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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회란 이름의 「개인전」이나 「그룹전」이 해방
된 1945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50회>를 거듭한다는 것
은 한국에선 그리 쉽지않은 일이다.
기업이나 단체도 마찬가지다. 50여년을 지탱해왔다면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수없이 넘었으리라 짐작간다.
해방이 되자 38도선이 그어져 남북으로 갈라지고 사상적 갈
등에다 6·25전란은 서울을 위시한 이땅을 초토화했었기에
문화적 발전의 저해요인이 되었던 것은 당연했었는지도 모른
다.
-그런데 여기 1945년에 창립된 「대한산업미술가협회=사단
법인」가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
에서 제50회 회원전에 곁들여 제34회 공모전의 찬란한 막을
열었었다.
▼「대한산업미술가협회」가 6·25전란이 아니었더라면 금년
에는 제54회나 제55회전을 갖았을터인데 6·25전란동안 4·5
회의 전시회가 빠졌던 기록으로 남았다.
실타래子는 「대한산업미술가협회」창립당시 참가했던 10여
명가운데의 한사람으로 현재 「고문」으로 있지만 생존한 이
는 「이화여대 미술과장」을 지냈던 조병덕(趙炳悳=현재 고
문)화백과 둘뿐이다.
참으로 세월은 흐르는 물같이 구름같이 50여성상을 훌쩍 뛰
어넘어버렸다.
「산미협회(産美協會)」는 좋은 선배들이 있었기에 「한국
디자인」의 오늘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고 훌륭한 후배들은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한국디자인」을 세계에 빛내는 역
군들이 되었다고 확신하니 감개무량하다.
▼「1944년 12월27일 조선산업미술가협회로 출발한 대한산업
미술가협회는 우리나라 디자인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
닐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권영휴, 한흥택, 이완석, 홍순문, 조능식, 조병덕, 최정환, 이
봉선, 홍남극, 엄도만 등 선구자적인 미술가와 공예가들의 결
집체였던 「산미협회」는 해방된 조국의 디자인, 공예등 관
련학과를 이룩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46년 10월 조국광복과 산업부흥이란 테마전을 시작
으로 국산품애용, 관광 등의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한 전시회
를 통해 디자인 및 공예의 중요성을 사회에 인식시키고 확산
시키는데 개척자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초기의 활동이 60년대 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 최초
의 디자인과 공예의 공모 작품전을 겸해 개최하여 신인의 등
용문이 되기도 했다.
이제 반세기의 협회의 역사를 기록한 50년사는 바로 우리나
라 디자인공예사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산미展50회 안내문 중에서).
▼-여기서 다시 「산미협회」50년사의 권두에 실린 실타래子
의 글 한토막을 빌려본다면 「(前略) 21세기는 「문화와 정
보화 사회」라고 한다. 우리 「산미협회」는 시시각각으로
변동하는 새로운 정보문화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에다 접목
시켜 「디자인 한국·개성한국」의 이미지를 십분 살려 나갔
으면 하는 소망이다.(中略)
-또 다시 50년후 ─즉 백년후에는 어떤 젊은 후학이 <산미
협회>의 대를 이어 앞장서줄 것인가를 머리에 그려보니 그
저 감계가 무량하다.
끝으로 「사단법인 산미협회」가 변함없이 새로운 도전과 실
험으로 더욱 탄탄한 「한국디자인」의 견인차가 되어 세계에
빛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편집자註:본지 조능식 편집인은 현재 「産美協會」의고문이
다.)
趙 能 植 (本紙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