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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A급 전범찾기
우연히 접하게 된 한 TV 시사 토론프로그램에서 「미국은
개념만들기에 능하고 일본은 실행에 능하다」는 말을 들었
다.
재미있는 것은 「법률에 써있는 것은 절대로 지켜야 하며,
잘 안되면 감독하는 관청에 찾아가 자세한 설명을 듣고, 그
를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 있는 일본인들의 예로,
천황을 위한 관료 양성 메뉴에 익숙해 있는 그들에게 만약
『오늘부터 자유롭게 자기 책임하에 일을 처리하라』고 한다
면 모두가 『개혁이전이 좋았다』며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라
는 다소 농담섞인 지적이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현재 일본전체에 감돌고 있는 이런 회고적
분위기와 우리의 이야기가 잠시 맞물리는듯 하더니 토론의
중심이 엉뚱하게도 금융위기의 A급전범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로 비약되고 있었다.
여기에 재경원과 한국은행의 핵심맴버 몇몇의 맹목적인 추종
과 비전문성에 중론이 모아지면서 모든 것이 국민적 요구라
는 이론하에, 마치 국민이 스스로 개혁을 추진해 나간 것으
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개인의 이익에 부합되어
벌어진 일이라는 실랄한 비난이 이어졌다.
식상한 반창고 치료법
줄거리가 이정도라면, 우리는 코웃음친다. 당연한거 아니냐는
이야기다.
혹자는 좀더 전문적인 목소리로 「미국이 개념만들기에 능하
고 일본이 실행에 능하다면, 우리는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말장난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IMF관리체제하에 들어간지 불과 100일만에 국
민들이 다시 흥청거리기 시작했다는 아랫물의 모순과 정치와
경제가 이미 썩을대로 썩었다는 현실을 당연한 상식으로 뱃
짱을 튕기는 윗물의 뻔뻔함은 정말 아무런 연관이 없을까.
혹시는 수술이 급하다는 것은 알지만, 메스를 가하고 난 다
음의 상황에 대해 수술하는 자나 수술받는 자, 모두가 불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처를 임시로 가려주는 반창고적 치료를 해 놓고 서로를 의
심하는 사이, 운명의 시계는 너무나 촉박하게 지나가고 이쯤
에서 참을성 부족한 사람들은 과연, 말그대로 『개혁이전이
좋았다』는 망상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미도파의 몰락과 잔혹한 글로벌 경쟁
그런데, 지난 18일 국내의 유수의 백화점 미도파가 최종 부
도처리 됐다.
백화점이 흔하지 않던 시절, 미도파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가보고 싶었던 선망의 상징이였다.
그곳에 가면, 없는 것이 없고, 최고급을 보장하는 제품이 즐
비하다는 막연한 상상력과 함께 자랐던 추억의 백화점이 끝
내 경영에 실패한 한 중소백화점의 몰락정도로 간략하게 받
아들여지는 이런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글로벌 경쟁시대의
냉혹함을 가늠케하고도 남는다.
거기에는 이미 전통과 역사를 대표하는 기업으로서의 파워도
기반도 심지어는 소비자들의 지지조차 모조리 상실해 버린
기업의 초라함 이외에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을 아까워하고 애석해 하기에는 우리에게 놓여진 현
실이 너무나 각박하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매사에 얼마나 우리 자신이 비전문적이
였는가를 심각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국제화·세계화 시대」라며 한소리로 떠
들어 대긴 했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 정부도 국민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것... 시행착오를 각오해야 하는 창의적인 인
간에 대한 투자보다 남의 것을 컨닝하고 카피하며 소비자를
현혹해낼 수 있는 기술자쪽이 훨씬 더 전문가적인 대우와 혜
택을 누려 왔던 것...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의 욕심이
앞섰던 것...등등 입으로 말하는 이론과 내재된 윤리가 전혀
달랐기에 나타난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도퇴와 소멸속에서 피는 희망
아무런 투자도 노력도 없이 순간의 기회포착만으로 잘 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조직과 시스템이 느슨하고 셋업되
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의미에서 지금은 경제전쟁시대...
기라성같이 크게만 느껴졌던 기업들의 글로벌이라는 이름하
에 속수무책 무릎을 꿇고야 마는 도퇴와 소멸의 수난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위한 시스템이 도처에서 구축되고 있음을 감
지한다.
모든 경제의 블록이 무너져내린 지금, 모든 전세계와 대등한
입장하에 경제전쟁에 내몰릴 때마다 「전문가에게 맡겨달라
」 는 말을 하면서도 실지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모
습을 적나라하게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젠 적어도 자조적이고 남을 상처내는 식상한 난상
토론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생존을 위해 자신할 수 있는 스스로의 개혁이
얼마만큼인가 하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