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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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새로운 것 창출하는 예술분야, 대중과 호흡해야”
 

70년 늦가을, “패션은 보기 위한 귀족예술이 아니라 입기 위한 대중예술이다”라며 한국 최초로 길거리 패션쇼를 열었다. “패션이 예술이라면 무대에 한정 시킬 수 없다”는 논리로 당시 고정관념에 파격과 일탈을 날렸던 디자이너, 아니 ‘예술가’ 손 일광(一 光)선생. 대한민국 남성 1세대 디자이너이자 전위예술가로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제 4집단’의 창립 핵심멤버였던 손 선생은 척박한 ‘패션’을 ‘예술’의 장르로 승화시켰다.

60년대부터 ‘명동’은 패션과 예술의 태동이 시작됐고 순수와 낭만, 피 끓는 도전과 창작 열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손 일광 디자이너의 명동 의상실에는 낮에는 옷을 좋아하는 고객들이, 밤에는 각계 각층의 예술가들이 모여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곳에서 ‘관념’과 ‘규격’에 도전하는 새로운 것에 대한 ‘모의’가 시작되고 ‘열망’이 실현됐다.

한국섬유신문은 창간 31주년을 맞아 손일광 선생의 기억속을 더듬어 ‘패션문화의 원류’를 거슬러 재 조명하고자 한다. ‘패션의 거대 산업화’이전 태동기의 순수함, 디자이너 개인의 역사를 격의 없는 논조로 싣고자 한다.
/글=이영희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강재진 기자 [email protected]



 


어릴적 꿈은 ‘연금술사’
‘남이 하지않는 것’ 열망
화공학도에서 패션계 입문


73세에 청년의 눈빛을 간직한 사람, 이름(一光)만큼 남다른 기감(氣感)과 아우라가 느껴졌다. 범상치 않고 혹은 생뚱맞은 화두로 시작해 머리가 아파지다가도 이내 빨려들어가 집중하게 만드는 손일광 선생만의 어법에 익숙해져 원고를 정리하기 까지 한 계절이 지났다.

70년도 잡지에 실린 서슬 퍼런 젊은 날의 날카로운 흑백사진을 보기도 하고 그와 함께 했던 김구림, 정강자, 정찬승, 방태수 등 예술가들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면서 기자가 실감하지 못했던 시대를 이해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회를 거듭하는 인터뷰를 통해 ‘현재’보다 더욱 ‘역동적인 과거’에 매료됐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 오늘날 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기자가 틀에 박힌(대중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하면 기대치 않은 반대의 답이 나와 마치 면벽수도 하는 기분이 느껴지는 찰라 손 선생은 과거와 현재, 기억속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을 보여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은 적이 많았다.

안달하는 기자를 보고 혼자 웃는 저의(?)는 무엇일까? 고뇌하다보면 60년대와 70년대 80년대를 교차하면서 연관시키는 화법에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소중한 추억과 정보를 제공해준 손일광 선생과 지인들에게 혹여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패션 피플들에게 전달하게 될 재밌는 스토리 전개에 기대도 모아진다. 독특한 대화 전개에 골머리를 앓던 기자는 테마를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로 정했다.

연도별 전개보다는 이슈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쉬운 길’을 선택하는 잔머리를 굴린 셈이다.

<한국 최초 거리 패션쇼를 열다>
70년 늦가을,주요 일간지에 <길거리로 나온 패션쇼>라는 기사가 아래와 같이 게재됐다.
“한국최초의 가두 패션쇼가 지난 30일 서울 명동의 국립극장, 광화문지하도, 이화여대 입구 등 세곳에서 열렸다.

전위예술의 연출로 화제를 일으킨 바 있는 의상디자이너 손일광씨의 제 1회 의상발표회에 패션모델 그룹인 ‘스루회’가 협찬함으로써 열린 가두패션쇼는 날씨가 추워져가면서 화려한 장소를 빌어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각종 패션쇼에 반기를 들고 한국최초로 타운웨어를 환경에 맞는 거리로 끌고 나왔대서 주목을 끌었다...”

먹고 살기 힘겨웠던 시절, <패션>이라는 장르조차 생소했던 그 때 마치 부유층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던 <패션쇼>를 그것도 거리에서 시도한 것은 큰 이슈였다. 기사에는 손일광 선생의 독특한 화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거리패션쇼’를 두고 “패션쇼에 있어서의 무대 배격”이라고 밝혔는가 하면 “서울시민과 서울 가두가 엑스트러로 참가하는 쇼”라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손일광 선생은 “그 시대에 내가 제일 절실했던 것은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이었다” 면서 “패션은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예술분야이다. 규격화된대서 찾으려 하면 새로운 것이 나오기 힘들다. 새로운 이벤트를 하되 정리해서 논리적으로 만들어야지 이상하다고 다 기발한 것은 아니다.

         
 

이벤트가 해프닝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정착시켜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패션을 대중과 호흡하게 하고 거리로 끌어낸 당시의 파격이 지금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도 ‘새로운 장르’로 이벤트가 구축됐기 때문이다. 그 때 최초의 거리 패션쇼는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전위화가인 김구림씨의 연출이 엮어져 길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종전의 무대예술의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모던발레의 요소가 가미된 매스게임을 하는 것 같은 모델의 워킹과 의상이 춥고 침침한 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백색’을 주제로 다음해(71년도) 봄 패션의 경향을 앞당겨 제시한 듯한 코트와 마이크로미니 스커트, 판탈롱 등이 소개됐다. 한국최초의 거리 패션쇼를 한 모델은 권정희, 조윤주, 김경이, 남유미 등 16명으로 기록돼 있다. 모델도 연출자도 디자이너도 같은 코드를 가진 ‘용감한’ 프로들임에 틀림 없어 보였다.

언론에서는 손일광 디자이너를 대구청구대학 화공학과를 나온 ‘공학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공학도가 어떻게 패션계에 입문하게 됐을까?
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의 소싯적 꿈은 ‘연금술사’ 였다고 한다. 의아한 표정의 기자에게 손 선생은 “시골에서 풍족하지 않은 생활을 하다보니 부자가 되고 싶었고 ‘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금광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금을 직접 만들고 싶었다’는 발상이 디자이너 손일광 답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금을 만드는 공식을 수립해 인하공대 화공학과 교수를 직접 찾아갔다. 교수는 엉뚱한 시골청년쯤으로 생각하고 무시했는데 보름간을 찾아가 따라다니니 마침내 대화의 문을 열어줬다고 한다. “금을 만들러 왔다며 공식을 내밀었더니 차비가 든 봉투를 주면서 다시 내려가라고 하더군요(웃음)” 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공식을 보고 교수도 놀란 눈치였다고 한다. 문제는 실제 금시세 보다 만드는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데 있었다. 고향으로 내려간 청년 손일광은 대구 청구대학 화공과에 입학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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