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캔버스로 모든 것이 소재
봉제형식 타파 의상을 예술로
“형식보다 아름다움이 중요”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 예술의 정수”라고 손일광 선생은 늘 강조한다.
오트쿠튀르 디자이너에서 율산과 모라도 등 패션 기업의 기획, 디자인 업무를 총괄하는 제 2 인생길을 걸어 오던 손일광 선생은 어느날 “ 곳간이 다 비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느낌을 주는 창의적 열정(곳간)이 비어버렸으니 이제는 ‘머리’를 써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손일광 선생은 “제일 중요한 자산은 머리”라는 결론을 내고 특허를 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었다. “남들은 내 생각을 따라 올 수 없겠구나”라는 자만심으로 시작한 특허작업을 하다보니 본인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지식 공유의 세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손일광 선생은 아직도 20대의 열정과 영혼, 창작의지를 끊임없이 발산하고 있다. 기자와의 인터뷰중에서도 대뜸 생각지 못한 질문을 하곤 하는데 몹시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있다.
“원형보다 빨리 달리는 바퀴가 있다고 생각하나?”, “뉴튼의 만유인력 ‘빨간사과’를 뒤짚어 ‘하얀사과’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나?”는 식이다. 한번도 생각하지 않은 것과 못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무튼 기자는 물끄러미 ‘멍’한 상태로 얼어있을 수밖에.
손선생의 이론을 빌리자면 뉴튼의 ‘빨간사과’는 예전에도 있었고 이제는 ‘만유인력=빨간사과’는 보편타당한 지식이 됐단다. 지구의 중력에 따라 떨어지는 ‘빨간사과’말고 떨어지지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하얀사과’에 대해 평생을 생각했다고 하는데... “점보기는 수백톤이지만 하늘을 날고 있잖아요?”라며 ‘탈 보편타당성=하얀사과’라나...
현재 뚜렷한 종교가 없는 손 선생은 2여 년 동안 밖에도 나가지 않고 “신은 누가 만들었나?”에 대해 골몰했다고 한다. ‘과학의 종교’를 만드는 일에 몇 년을 소요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종교가 없다고 했지만 부인께서 성당에 갈 때는 꼭 모셔다드리는것에 자부심도 느낀다). 손일광 손생은 “항상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나이’라는 단어는 그의 사전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안중근의사 동상에 한달에 두 번씩 옷을 갈아 입히는 것도 생각했었다고 한다. 패션과 의상에 대해 대중에게 격의없이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란다. 또는 나무로 토테미즘을 연상케하는 의상을 만든다든가(사람은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의 소재로 옷을 지어야 한다), 종이로 웨딩드레스를 만든다든가 수없는 아이디어를 떠올려본다.
한번 밖에 입지못하는 웨딩 드레스를 대여비만 100만 원 넘게 치러야 하는 허례허식 타파에 대해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모든 창작, 특히 섬유패션은 기존 소재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한다며 드레스를 종이로 만들면 젖어서 안된다는 고정관념에 자극을 주기위해 종이드레스를 입고 작가가 분수대에 들어가는 등 해프닝도 생각하고 있다고.
“지구를 캔버스 삼아 주변의 모든 것들을 소재로 봉제라는 형식을 탈피한 작품을 만들어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소재가 될 수 있고 작품일 수 있다는 손 선생은 패턴이라는 형식보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옷, 작품을 마음껏 해 보지 못했다(?)고 하는 손일광 선생은 전시관을 만들어 이 모든 것들을 실천하고 보존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철망, 동판 등도 의상소재가 될 수 있다는 손 선생은 최근 청평 자택과 현재 짓고 있는 박물관 커튼을 동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멀리서 찾지 마라, 주변의 것들이 모두 창작의 소재이다. 옷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이들 소재를 접목해 창작과 예술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며 옷보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실상 디자인이고 옷보다 더 큰 건물, 자동차등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관념적 지식의 틀이 없다. 그러니 항시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다”고 감사해 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식도 변한다. 자신이 할 수 있을 때 해야 할 일을 꼭 할 것”이라는 손일광 선생은 지금 청평에 미술관이자 박물관을 짓고 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