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수정의 밀라노 스토리 (2)] 이탈리아 패션계에 불어닥친 ‘젠더프리’ 열풍
성소수자에서 ‘모두를 위한 패션’으로 통념 바뀌어
‘엑하우스라타·순네이·루초바노티’ 앞장서 주도
2020-11-01 편집부
세계 의류업계 트렌드 변화는 그때마다 큰 흐름을 이끄는 브랜드나 디자이너에 의해 만들어지고, 새로운 트렌드는 이후 몇 시즌 동안 세계 패션스타일을 좌우한다. 셀린(CELINE’)의 피비 필로(PHOEBE PHILO)가 2017년까지 10년간 미니멀리즘을 선도하는 사이, 패션계에서는 성별 구분이 확실치 않은 스트리트웨어 스타일이 새로운 트렌드로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최근 몇 시즌 동안 에이젠더(AGENDER), 젠더플루이드(GENDER FLUID), 젠더뉴트럴(GENDER NEUTRAL) 등 무수한 젠더 스타일을 정의하는 용어가 문화 예술분야를 시작으로 라이프스타일과 패션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며 더 이상 낯선 이슈가 아님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실감하고 있다.
이 현상은 90년대까지 유니섹스라는 용어로 유행이나 그 필요성에 의해 구분돼 오던 것이 지금은 젠더플루이드 등 여러 유형의 언어로 표현되면서 수 많은 대기업브랜드 뿐만 아니라 신생브랜드까지 중립적인 자세에서 성 개념을 다루는 브랜드 철학을 내걸거나 ‘모두를 위한 패션’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스토리텔링과 커뮤니케이션에 집중하는 것이 오늘날의 두드러진 현상이 됐다.
유럽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문화나 트렌드가 이탈리아에서는 항상 한걸음 늦게 나타나는 게 보편적인데, 특히 젠더에 대한 통념이 아주 강한 나머지 새로운 변화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또한 이탈리아 패션업계는 대기업 브랜드 중심으로 패션시스템이 깊이 자리잡아 색다른 아이디어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이탈리아 패션에서 유니섹스의 근간을 찾는다면 7, 80년대부터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가 선보이기 시작한 어깨선을 부드럽게 한 남성복 자켓이나 그 시대 워킹우먼 이미지를 돋보이게 한 남성복 스타일의 여성 수트를 꼽을 수 있다.
이렇게 아르마니와 베르사체 등 소수 브랜드에서 시작된 유니섹스 개념은 오랜 시간이 지난 최근에서야 구찌(GUCCI)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의 데뷔와 함께 세계뿐만 아니라 폐쇄적인 이탈리아 패션피플 앞에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구찌에서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선보인 2015년 추동 남성복 런웨이에서는 남성복을 입은 여성모델이 등장하고 여성 쉬폰 블라우스를 입고 가방을 핸드백처럼 어깨에 걸친 남자모델이 등장했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높은 판매 기록과 대중 선호도까지 연결되며 이탈리아 패션계가 자유로운 젠더 이슈에 더욱 개방되고 하나의 확실한 트렌드로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 구찌, 루이비통 등 대기업들은 앞다퉈 패션마켓의 새로운 영역을 장학하기 위해 젠더이슈에 관련된 의류, 액세서리, 향수 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했고 소비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에 돌입했다.
영국 브라운스(BROWNS), 셀프리지(SELFRIDGES) 등 세계적인 패션부틱도 젠더 뉴트럴 스페이스를 확보하고 온라인 스토어에서는 새로운 공간을 광고하기 시작하며 트렌드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또 자라(ZARA)와 에이치앤엠(H&M)으로 대표되는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노젠더 존을 만들어 온오프라인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성평등에 관한 캠페인이나 청소년의 성에 대한 감수성을 돋보이게 하는 소셜미디어로 트렌드의 최전방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기류로 인해 기존의 젠더플루이드 개념에 관심을 가졌던 디자이너들도 더욱 자유로운 스타일로 패션을 표현함으로써 소비자에 앞서 디자이너들 자신도 젠더프리 현상의 주최자가 된 것이다.
이 트렌드의 대표주자인 ‘엑하우스 라타(ECKHAUS LATTA)’는 돋보이면서도 웨어러블한 상업적인 컬렉션으로 주목을 받는 반면, 스코틀랜드 출신 디자이너 챨스 제프리 러버보이(CHARLES JEFFREY LOVERBOY)는 자유로운 그래픽과 패치워크 등 예술적 방식으로 아방가르드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이탈리안 라벨 중에는 순네이(SUNNEI)나 루초 바노티(LUCIO VANOTTI) 등 몇몇 브랜드를 예로 들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패션스타일이 사회나 문화로부터 강요 받아오던 20세기까지와는 달리, 달라진 젠더 개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밀레니얼 세대들은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며 다른 사람보다 먼저 유행을 앞서 나가려는 강한 욕구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 트렌드는 더 이상 성소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미래로 나아가는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로 ‘모두를 위한 패션’이라는 개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구찌가 올해 초 미국 선댄스 독립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에서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7분짜리 단편영화 ‘더 퓨처 이즈 플루이드(The Future is Fluid)에서는 새로운 세대들이 젠더플루이드 트렌드를 통해 호기심 어리고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만의 메시지를 들려준다. 우리의 젊은 세대와 패션의 미래에 관심이 많은 기성세대에게 권해보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