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수정의 밀라노 스토리 (4)] 길거리에서 갤러리로 진출하는 ‘그래피티’ 문화
밀라노 시민, 아직은 찬반의견 첨예하게 대립
2006년 설립된 反그래피티 단체 ‘리테이크 밀라노’
인체 무해 스프레이·페인트 개발, 친환경 운동 주도
2020-11-29 편집부
유럽에서 기차로 여행하다 보면 멀리 보이는 건물이나 기차칸 외관에 빼곡히 그려진 그래피티(GRAFFITI)를 쉽게 볼 수 있다.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닌 만큼 그냥 지나칠 때도 있지만 훌륭한 그래피티가 눈에 띄면 나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게 된다.
그래피티 같은 스트리트 아트에 익숙한 유럽의 다른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도 많은 문화유산이 위치해 있는 시내 중심 지역이나 주거지역의 그래피티 활동을 막고 있다. 따라서 라이터(Writer)들은 가능한 시에서 지정하는 시내 공간에서 작업하거나 혹은 암묵적으로 허가된 한적한 교외지역을 찾아 활동하기도 한다.
그렇게 합법적인 영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한 아티스트 작품은 밀라노 시내 소셜센터(Centro Sociale) 인근이나 시내로 들어오는 입구의 철로벽을 따라 다채롭게 펼쳐져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며칠 전 밀라노 외곽 고르곤졸라 지하철역에서 야간 정차된 지하철 외부에 불법 그래피티 작업을 하던 20대 스페인 라이터 3명이 체포된 일이 있었다. 그날 이들은 단순히 스프레이 몇 통과 카메라를 압수당하는데 그쳤지만 이런 일은 밀라노 인근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자칫 인명피해로 연결되는 위험한 상황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래피티는 발생 배경에서 볼 수 있듯 폭넓은 표현법, 지적인 해석과 무수한 규칙으로 설명되는 기존의 예술과 달리 그것을 통제하려는 모든 법질서를 무시하고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리의 예술’이라 불리운다.
그래피티, 무랄레스(MURALES)라 불리는 이 자기표현 방식은 젊은 아티스트들의 손을 거쳐 전세계로 퍼져 나가는 사이 각 나라의 개성과 섞이며 그 지역의 새로운 스타일로 거듭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병사들이 옮겨가는 지역마다 벽면에 그려 넣던 킬로이(KILOY) 낙서와 간단한 만화형식에서 시작된 그래피티는 1960년대 필라델피아의 기차칸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보였고 70년대 뉴욕을 거쳐 80년대에 이르러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밀라노에서는 카를로 토리겔리(Carlo Torighelli, 1909~1983)가 70년대 파르코 셈피오니(Parco Sempione)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밀라노 곳곳에 치·티(C·T)라는 자신만의 태그로 활동한 것이 시작점이라 볼 수 있다.
유럽에서 그래피티가 가장 발전한 곳은 베를린과 런던이다. 최근에는 밀라노나 이탈리아 곳곳에서도 그래피티 작품들이 급격히 증가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굳이 시내 뿐만 아니라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멀리서도 보이는 폐건물 외벽이 모두 강렬한 이미지의 그래피티로 둘러싸인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여느 예술분야와 마찬가지로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은 각자의 개성과 스킬을 개발함으로써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과 비교해 자신의 확고한 이미지와 개성을 살리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그래피티에 관심이 많은 팬들은 작품속의 태그(스트리트 아티스트의 예명) 없이도 새롭게 등장한 작품의 메시지나 기법만으로 작가가 누구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6월 밀라노 외곽지역인 트레짜노 술 나빌리오(Trezzano Sul Naviglio)에 세계 30여개국의 200팀이 넘는 아티스트들이 참가한 어반 자이언트 페스티벌(Urban Giants Festival)이 열렸다. 롬바르디아 주와 트레짜노 지방자치단체의 후원으로 가수들 콘서트나 브레이크 댄스공연이 어우러져 이탈리아에서도 스트리트 문화가 더욱 정착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반면 모든 그래피티 아티스트나 그래피티를 배우는 사람들이 허가된 공간에서만 작업을 하지 않는 이유로 밀라노시와 시민들은 시내 주거지역에서 낙서로 뒤덮인 건물 외관에 자주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결국 밀라노시는 최근 허가되지 않은 공간의 그래피티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불법적인 그래피티를 지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시민들 찬반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아직도 불법적인 예술활동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가끔 밀라노 곳곳에서 건물 외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를 지우고 파손된 부분을 정리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리테이크 밀라노(Retake Milano)라는 단체로 2006년 만들어진 반그래피티 협회의 새로운 이름으로 밀라노시의 친환경프로젝트를 실천하는 자원봉사 그룹이다.
그들은 이탈리아 전국의 그래피티로 인한 피해상황을 분석해 매년 수백만 유로에 이르는 국가 경제적 피해를 알리며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그래피티로 뒤덮인 건물 외벽을 정리하는 것에서 나아가 기존의 유해한 스프레이 사용을 줄이는 동시에 인체나 환경에 무해한 스프레이와 페인트를 개발해 친환경 운동을 실천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그 외 스프레이 구매시 신분증 확인과 함께 미성년자에게 스프레이 판매를 금지하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힙합 문화와 함께 태어난 그래피티는 그 영역과 가치가 점점 확장돼 이제 건물의 외벽만이 아닌 작품이 그려진 벽면을 떼어내 아트갤러리나 박물관으로 옮겨오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볼로냐 인근 자신의 작품들을 검은색으로 덧칠해 화제가 된 아티스트 블루(BLU)는 자기 작품을 길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항상 봐주기를 원했고 박물관 내부에서 전시되는 것을 무의미하게 생각했다. 이는 스트리트 아트의 뿌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다.
밀라노에는 아직도 가던 길을 멈추고 아티스트의 작업현장을 바라보는 팬들이 있는 동시에 그래피티를 단순히 도시 외관을 더럽히는 존재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찬반 의견 속에서도 이 스트리트 아트는 21세기를 대표하는 예술의 한 형태로 자리한지 이미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