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수정의 밀라노 스토리 (23)] 코로나19 경각심 일깨운 유명 디자이너 부부의 타계
이탈리아 디자인계 거목 엔조 마리
유명 미술평론가 레아 베르지네 부부
코로나에19 감염, 24시간 차이로 사망
이탈리아 국민에 경각심 불러일으켜
2021-10-29 편집부
전 세계가 코로나19 소식으로 뒤덮인 가운데 조금 잦아졌던 감염증 확산이 여름 이후 또다시 유럽을 강타하고 있다. 특히 지난 2월부터 유럽의 첫번째 최대 피해국이 됐던 이탈리아는 5월 이후부터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는 동안 스페인, 프랑스와 영국이 특히 심해진 가운데 그나마 잠잠했던 이탈리아마저 최근 2주만에 하루 확진자 수가 1만5000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상태가 심각해지자 이탈리아 당국은 야간 통행금지와 요식업의 저녁 시간대 폐쇄 등 시민들 활동을 제한하기 위한 대책들을 다시 적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수많은 예방 수칙과 정부가 내놓은 치료대책들 뿐만 아니라 각종 매스컴과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정보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19에 대한 경각심이 아주 높은 상태인 것 같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유럽인들 중에는 코로나19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아직도 이 사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쯤 되면 정부 정책에도 문제가 있고 사람들 의식에도 큰 전환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인들이 코로나19에 대해 큰 경각심을 갖게 된 일이 지난 주(10월 19일) 밀라노에서 일어났다. 바로 20세기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거목인 엔조 마리(Enzo Mari, 1932~2020)와 그의 아내이자 미술평론가인 레아 베르지네(Lea Vergine, 1936~2020)가 하루 간격으로 사망한 것이다. 대중에 잘 알려진 유명인들의 죽음은 사회적 파장이 클 뿐 아니라 사태의 심각성을 대중에게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남편인 엔조 마리는 밀라노 인근 노바라 지역 출신으로 일생동안 밀라노에서 활동한 디자인계의 세계적인 유명 인물이다. 그는 산업 디자인 협회에서 이탈리아 디자인의 품질을 알리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수여하는 콤파쏘 도로(COMPASSO D’ORO) 상을 다섯번이나 수상했다.
콤파쏘 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산업디자인 상으로 엔조 마리는 1960년대에서 2000년대 초까지 이 상을 수상해 그의 디자인 철학과 실력을 인정받았다.
또 그의 작품들은 로마 국립현대미술관과 밀라노 트리엔날레 뿐 아니라 뉴욕의 모마(MoMA)에서 암스테르탐의 스테델릭 뮤지엄(STEDELIJK MUSEUM)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주요 미술관 및 디자인 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또 그는 몇 개월 전 밀라노시에 일생동안 모아왔던 자신의 예술 작품, 사진 아카이브, 서적 및 카탈로그, 도면, 포스터 등 1500여점을 기부했고 밀라노의 폴리테크니코에서 후배 양성에 기여했다. 특히 이탈리아처럼 다양한 정치색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여과없이 밝히며 그가 위치한 디자인 산업현장에서 당당함을 보여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다.
레아 베르지네는 나폴리 출신으로 특별한 외모로 인해 예술계의 아이콘으로도 유명했지만 큐레이터이자 여성 예술 평론가로 큰 명성을 얻었다. 1960년대 당시 이탈리아 예술계는 남성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가 이끌었던 아이러니하고 독창적인 공연과 예술 스타일이 돋보이기 시작하면서 여성 예술인들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됐다.
그의 20대 시절 중요한 미술 세미나 도중 자신을 상대로 몇 차례 성희롱적 발언을 한 상대와 재판에서 승소한 일은 아직도 레이 베르지네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일화로 남아 있다. 그는 마니페스토(MANIFESTO)와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 등 주요 일간지와 무수히 협업했고 행위 예술과 같은 현대 여성 예술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역사적 인물로 남았다.
두 사람은 1960년대 초 나폴리에서 처음 만난 이후 70년대 말경 밀라노로 이주해 활동을 이어 나갔고 이탈리아 예술과 디자인을 국제적으로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후 같이 입원한 밀라노 산 라파엘 병원에서 치료 중이던 지난 19일 엔조 마리가 먼저 타계하고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레아 베르지네도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탈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 그들의 친척이나 지인 중에 이처럼 불운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아니면 그 심각성을 간과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엔조 마리와 레아 베르지네의 이야기가 뉴스와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지만 이런 일은 전세계에서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보통 사람들의 가정에서는 흔한 일이다.
아들과 부모가 모두 사망했거나 자매, 형제나 부부가 함께 사망한 사례도 아주 많았다. 물론 엔조 마리와 레아 베르지네의 죽음에 대한 충격은 그들의 남겨진 딸이나 지인에 국한되지 않고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코로나19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