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진의 텍스타일 사이언스(34)] 서스테이너빌리티 보여주는 물절약 세탁기
2023-09-23 안동진
의류의 청결과 잦은 세탁은 인류문명을 상징하는 미덕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위생 상태에 대한 정보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정기적인 자기 관리를 통한 건전한 생활습관, 적어도 빈곤에 노출되지 않고 있다는 신호이다.
세제가 필요 없는 세탁기가 나온 적 있다. 그 세탁기는 일종의 사기였다. 세제를 넣는 대신 미상의 돌 같은 것을 사용했는데 사실은 이 돌이 세제의 기능을 대신한 게 아니었다. 돌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찰을 증가시키는 것이 전부이다. 물리적인 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제의 기능은 세탁물에 존재하는 오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름 성분을 분해하는 것이다. 즉, 화학적인 일을 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작업으로 화학 반응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 세탁기의 비밀은 소비자의 세제에 대한 과신을 이용한 일종의 심리 게임이었다. 사실 세탁기는 세제가 없어도 80%정도는 일을 수행한다. 오로지 물과의 마찰력만으로 오구를 80%는 떨쳐내는 것이다. “세제가 없어도 80%는 세탁이 된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이었다. 물론 기름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벽한 세탁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제 없이는 세탁이 아예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소비자의 눈에는 세제 없이도 80%씩이나 일을 하는 신기한 세탁 돌이다. 이런 후진국형 장난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패션(Fashion) 산업에서 서스테이너빌리티(Sustainability)가 요구하는 새로운 3대 질서는 자원절약, 친환경 그리고 건강이다. 그 중에도 수자원 절약은 가장 시급을 요하는 핵심 과제이다. 청결한 백의민족에게 세탁은 미덕이었지만 잦은 세탁은 귀한 수자원인 물을 대량으로 사용하고 그만큼 오염도 증가시키는 악덕이 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세탁문화는 종말의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음용이 가능한 깨끗한 수돗물 80리터가 단 1회의 세탁으로 사용하고 버려진다.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 종량제가 전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처럼 세탁도 종량제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영국의 리즈(Leeds) 대학이 케이스 스터디로 시작한 디자인 회사에서 만든 제로스(Xeros) 세탁기는 예전의 돌세탁기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전혀 다르다. 세계관부터 다르다. 이 세탁기는 세제 절약이 아닌 물 절약이 포인트이다. 서스테이너빌리티(Sustainability)를 겨냥한 신문명 세탁기인 것이다. 세탁의 물리적 과정은 오로지 물과의 마찰이다. 목욕처럼 액체만을 사용한 다분히 소극적인 세척작업인 것이다.
제로스 세탁기는 세탁의류와 마찰을 적극적으로 증가시키는 작은 마찰 구슬을 넣어 물리적인 작업을 추가하는 대신에 세제를 최소한으로 사용해 헹굼에 필요한 물 사용을 극적으로 줄인다. 세제를 줄이기 위해 구슬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물 사용을 줄이기 위해 세제를 최소로 투입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구슬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전에는 물 사용을 줄이는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제 사용이 중요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 반대이다.
John Wenz가 개발한 제로스(Xeros)는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 구슬을 사용해 물 사용량을 80%까지 줄였다고 한다. 세탁기는 오늘날 1회 세탁에 약 20갤런 물을 사용하지만 이 특이한 세탁기는 4갤런이면 충분하다고 Wenz는 주장한다. 이를 위해 세탁물 및 세제와 혼합되는 특별히 제조한 150만개의 폴리머 비드를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비드 무게만 25kg에 달한다. 그들은 모든 세탁기를 제로스로 교체할 경우 1년에 약 370 억 갤런 물을 절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로스 세탁기는 돌 대신 구슬을 넣었고 마찬가지로 마찰력을 증가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세제를 절약하는 게 아니라 물을 절약하는 것이 목적으로 돌 세탁기와 크게 다르다. 80년대에는 물을 아낄 이유가 없었고 지금은 세제보다 수자원의 절약이 더 중요한 시대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