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진의 텍스타일 사이언스(35)] 스케이트와 면직물의 광택
2023-10-13 안동진
직물의 광택은 예로부터 대단히 중요했다. 비싼 직물만이 광택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택=고급 원단이라는 공식이 성립했던 것이다. 속된 말로 ‘기름기가 흐른다’라는 현은 말 그대로 광택이 난다는 뜻이다. 고급 면인 피마면이나 이집트면, 해도면은 섬유장이 길기 때문에 면직물이라고 해도 뛰어난 광택이 난다.
부드러운 광택이 흐르는 파인(fine)한 천연의 면은 100수 이상 원사를 사용한 원단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하고 값진 것이다.
머서라이징(Mercerizing)이라는 가공이 개발된 이유가 바로 광택 때문이다. 영국의 존 머셔(John Mercer)가 발명한 이 가공은 면의 미세구조를 이용한 원리로 만들어졌다. 면섬유의 중심부에 찌그러져 있는 빈 공간인 루멘(Lumen)을 수산화나트륨을 이용하여 팽윤(부풀리다)시켜 광택을 부여한 것이다. 주름이 펴지면 광택이 난다. 콜라겐이 부족하여 피부 아래 실리콘을 주입한 분들은 잘 알 것이다.
1844년에 발명된 이 가공은 지금도 모든 면직물의 염색 과정에 기본으로 행해지고 있다. 의류 소재의 광택(Luster) 감성은 형태만 달리할 뿐, 매 시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트렌드이다.
원단에 광택을 부여하기 위해 섬유-원사-원단 등 모든 단계에서 다양한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섬유에서는 단면 설계로, 원사에서는 꼬임수 조절이나 실켓(Silket) 그리고 원단에서는 후가공 등이 있다.
원단의 광택 가공은 간단하고 비용도 저렴하지만 두 가지 부수효과가 따라온다. 첫째는 소프트 핸드 필(soft hand feel)이다. 면직물도 소프트(soft)해지지만 화섬은 극적으로 핸드 필(Hand feel)이 달라진다. 두 번째는 틈새가 메꿔지는 효과이다. 원단이 납작하게 압착되는 결과로 인해 원단의 틈새가 좁아져 적정 고밀도로 설계한 직물은 이 가공으로 다운프루프(Down proof)가 실현된다.
원단의 광택 가공은 소재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데 이를테면 화섬 원단의 광택가공은 씨레(Cire)라고 하고 면 원단은 친츠(Chintz)라고 한다. 캘린더(Calender) 가공이라고 할 때도 있는데 친츠나 씨레할 때 사용하는 압력 롤러를 캘린더라고 하기 때문이다(달력이라는 의미의 Calendar와는 스펠이 다르니 주의).
폴리에스터나 나일론은 가소성 소재이다. 즉 열에 의해 형태가 변하는 성형 가능한 소재이다. 따라서 열과 압력에 의해 섬유가 반영구적으로 납작해질 수 있다. 세탁 후에도 광택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면은 열이나 압력에 의해 유리전이 온도에 달하면 눌려 납작해지기는 하지만 영구변형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세탁 후에는 가공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다. 따라서 친츠는 100% 면보다는 T/C 혼방직물에 효과가 좋다. 그렇더라도 순면에 좀더 나은 친츠 효과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스케이트가 딱딱한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원리는 무엇일까? 얼음 표면이 매끄러워서일까? 그럴 리가 없다. 유리는 얼음보다 훨씬 더 매끈하지만, 유리 위에서는 스케이트를 탈 수 없다. 유리에는 없고 얼음에는 있는 특별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물이다. 칼처럼 예리하게 연마한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눌러 압력이 높아지면 얼음의 녹는점이 낮아진다.
영하의 온도라도 얼음이 녹아 물이 된다는 뜻이다. 이때 녹은 물이 얼음과 스케이트 날 사이에 들어가 윤활유처럼 마찰계수를 줄여준 덕분에 스케이트는 얼음 위를 바퀴라도 달린 듯 미끄러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스케이트 날이 왜 칼처럼 예리할까? 이다. 답은 간단하다. 그래야 더 잘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스케이트 날이 예리할수록 더 잘 미끄러지는 이유는 얼음에 닿는 날의 면적이 작을수록 얼음을 누르는 압력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손바닥에 연필을 같은 힘으로 눌러도 뾰족한 연필심 부분은 반대쪽 뭉툭한 부분보다 더 아프다. 이유는 더 작은 면적이 가하는 압력이 상대적으로 더 크기 때문이다.
친츠 가공용 캘린더는 다리미의 바닥처럼 밋밋한 표면을 가진 원통 롤러이다. 따라서 동일한 압력이 원단 전체에 골고루 전해진다. 만약 스케이트 날처럼 더 작은 면적을 만들어 가압하면 훨씬 더 큰 압력을 얻을 수 있다. 1895년, 슈라이너(Schreiner)는 스케이트 원리에 착안하여 캘린더 표면에 수직 방향으로 양각의 가느다란 줄무늬를 넣었다.
이런 작업을 엠보싱(Embossing)이라고 한다. 양각의 튀어나온 줄무늬는 스케이트 날처럼 예리하기 때문에 대단히 큰 압력을 원단에 가할 수 있다. 따라서 면직물 표면에는 몇 배나 더 반짝이는 줄무늬 광택이 생기게 된다. 만약 줄무늬가 사람이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가늘다면 줄무늬는 보이지 않고 광택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슈라이너는 1인치 당 무려 600개의 줄무늬를 넣었다. 효과는 극적이다. 슈라이너 가공된 면직물은 실크 같은 광택과 더불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