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산업미술가협회 제50회전과 50년사에 붙쳐서

1999-05-27     한국섬유신문
▼미술전시회란 이름의 「개인전」이나 「그룹전」이 해방 된 1945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50회>를 거듭한다는 것 은 한국에선 그리 쉽지않은 일이다. 기업이나 단체도 마찬가지다. 50여년을 지탱해왔다면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수없이 넘었으리라 짐작간다. 해방이 되자 38도선이 그어져 남북으로 갈라지고 사상적 갈 등에다 6·25전란은 서울을 위시한 이땅을 초토화했었기에 문화적 발전의 저해요인이 되었던 것은 당연했었는지도 모른 다. -그런데 여기 1945년에 창립된 「대한산업미술가협회=사단 법인」가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 에서 제50회 회원전에 곁들여 제34회 공모전의 찬란한 막을 열었었다. ▼「대한산업미술가협회」가 6·25전란이 아니었더라면 금년 에는 제54회나 제55회전을 갖았을터인데 6·25전란동안 4·5 회의 전시회가 빠졌던 기록으로 남았다. 실타래子는 「대한산업미술가협회」창립당시 참가했던 10여 명가운데의 한사람으로 현재 「고문」으로 있지만 생존한 이 는 「이화여대 미술과장」을 지냈던 조병덕(趙炳悳=현재 고 문)화백과 둘뿐이다. 참으로 세월은 흐르는 물같이 구름같이 50여성상을 훌쩍 뛰 어넘어버렸다. 「산미협회(産美協會)」는 좋은 선배들이 있었기에 「한국 디자인」의 오늘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고 훌륭한 후배들은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한국디자인」을 세계에 빛내는 역 군들이 되었다고 확신하니 감개무량하다. ▼「1944년 12월27일 조선산업미술가협회로 출발한 대한산업 미술가협회는 우리나라 디자인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 닐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권영휴, 한흥택, 이완석, 홍순문, 조능식, 조병덕, 최정환, 이 봉선, 홍남극, 엄도만 등 선구자적인 미술가와 공예가들의 결 집체였던 「산미협회」는 해방된 조국의 디자인, 공예등 관 련학과를 이룩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46년 10월 조국광복과 산업부흥이란 테마전을 시작 으로 국산품애용, 관광 등의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한 전시회 를 통해 디자인 및 공예의 중요성을 사회에 인식시키고 확산 시키는데 개척자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초기의 활동이 60년대 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 최초 의 디자인과 공예의 공모 작품전을 겸해 개최하여 신인의 등 용문이 되기도 했다. 이제 반세기의 협회의 역사를 기록한 50년사는 바로 우리나 라 디자인공예사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산미展50회 안내문 중에서). ▼-여기서 다시 「산미협회」50년사의 권두에 실린 실타래子 의 글 한토막을 빌려본다면 「(前略) 21세기는 「문화와 정 보화 사회」라고 한다. 우리 「산미협회」는 시시각각으로 변동하는 새로운 정보문화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에다 접목 시켜 「디자인 한국·개성한국」의 이미지를 십분 살려 나갔 으면 하는 소망이다.(中略) -또 다시 50년후 ─즉 백년후에는 어떤 젊은 후학이 <산미 협회>의 대를 이어 앞장서줄 것인가를 머리에 그려보니 그 저 감계가 무량하다. 끝으로 「사단법인 산미협회」가 변함없이 새로운 도전과 실 험으로 더욱 탄탄한 「한국디자인」의 견인차가 되어 세계에 빛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편집자註:본지 조능식 편집인은 현재 「産美協會」의고문이 다.) 趙 能 植 (本紙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