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주례박사님」의 「주례사절」선언…조능식
1999-04-30 한국섬유신문
▶결혼-하면 주례(主禮)가 누구냐하는데서 그 결혼식의 위엄
이나 양가문(兩家門)의 사회적 가치평가(?)가 표출되는냥 하
는 관념적 일반의식은 오늘도 변함이 없는듯 싶다.
요즘 정권이 바뀌면서, <주례>하면 국회의원이 <최상>인냥
꼽던 것이 금지되어 이제 국회의원나리들의 <주례>는 구경
못하게 됐다.
-주례-하면 생각하는 분이 몇 분 있다. 정부수립후 처음으로
내무부장관을 지낸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박사의 주
례는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그 때만 해도 <주례사>
는 길수록 좋았고(?) 권위(?)가 있는 것만 같았다.
어느때인가 조박사의 주례사가 시작되려는 무렵이었다. 신랑
·신부 앞에 서 있던 조박사는 그저 묵묵히 4~5분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신랑·신부를 뚫어져라 쏘아보고(?)있다가 “잘
살게-”하는 말 한마디만 하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아마 <주례사>치곤 이보다 더 간단·명확한 것은 전무후무
하리라 짐작됐다.
▶그 다음에는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선생과 「무애
양주동(无涯 梁柱東)=자칭 국보라 했던 분」 두 분의 주례사
는 감동깊고 예술적이며 시적인 것들이어서 오랜 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우리나라 경제학계 제1호 박사인 최호진교수다.
한편생을 대학에 몸담아 왔던 최교수는 숱한 제자들을 배출
했기에 「주례」 요청도 남달리 많았다.
어떤 일요일에는 하루에 세 번이나 주례를 섰었다. 그래서
가까웠던 친구들로부턴 「주례박사」란 별명을 받기도 했다.
젊어서부터 「백발」이던 최교수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제
자들이 장가가겠다고 주례 서달라는걸 어찌 거절할 수 있겠
나? 아닌게 아니라 나도 주말이면 조용히 <그림>이나 그리
고 싶단 말야.”
▶최교수는 고등학교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미술
학교를 지망하려 했지만 집안에서 막무가내로 「환쟁이는 안
된다」는 바람에 경제학으로 방향을 돌렸었다. 그러나 <그
림>에 대한 향수는 저버릴 수가 없었던 최교수였다.
실타래子도 옆에서 “눈 딱 감고 이제부터 주말의 주례는 사
절한다-고 몇번 강력히 선언하게 되면 그것이 관례가 될 것
”이라고 주례 그만 두기를 거들었었다.
-최교수가 선 주례횟수는 족히 수천번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
다.
그러던 차에 그에게 절호의 챤스가 찾아들었다. 다름아닌 교
환교수로 1년 남짓 독일에 가게 된 것이다. 독일에 있는 동
안 틈만나면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것은 물론이다.
서울로 돌아와 저녁을 같이한 자리에서 최교수는 친구들에게
약속했다.
“이제 주례는 폐업이다.”라고.
그 약속 이후 1년만에 인사동 「A화랑」에서 소품들로 「개
인미술展」을 열어 호평을 샀다.
그 후 그는 꾸준히 화필을 놓지않고 있으며 <주례>는 사절
하고 있다.
▶그동안 실타래子에게도 주례부탁이 심심치않게 들어왔었
다. 직장 후배들이나 친구자녀로부터인지라 거절할 처지가
아니라서 곤혹(困惑)을 감내했지만 이제는 완곡하니 겸허하
게 사절할 것을 다짐하게 됐다(이 글을 쓰고난 이후로부터).
그 이유로는 첫째 자신의 육체적 건강을 앞세워 양해를 구해
야겠다는 생각이다. 대개 주례의 청을 해올 때에는 1주일정
도의 여유를 두게 마련인데 승락을 해놓고 난 그 1주일 남직
한 동안의 「조심성」은 고역일 수 밖에 없다.
그동안 본인에게 어떤 사고나 차질이 생겨 남의 대사를 망치
게 되지나 않을까하는 기우와 우려에서다.
또 결혼식날 결혼식장의 거리등을 감안해서 시간의 엄수란
요즘같은 <서울의 교통난>에선 신경이 보통 쓰이는게 아니
다.
▶일전에도 친지의 부탁으로 주례를 서주고 나서, 일찍 찾아
온 <4월의 한여름 더위> 속에서 -그리고 <오가는 길>에서
진땀을 꽤나 흘렸다.
「좋은 일」을 했다고 가슴에서 미소지으면서도 <어려워지
는 자신>을 느꼈던 것이다.
趙 能 植 (本紙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