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인형과 엽기캐릭터
2002-04-28 유수연
비밀박스속의 주인공
어린 시절 문방구에 가면, 예쁜 공주님이 그려진 종이판을 살 수 있었다.
종이판속의 점선을 따라 인형과 옷을 열심히 오려내어 색색가지로 겹쳐보거나, 직접 디자인 해 입혀 보면서 동화속 공주님의 일상을 공상해 보는 것이 그 시절 최대의 일과였다.
그 평면적인 놀이에 대한 흥분이 가라앉을 즈음, 아이들 사이에는 바비인형의 붐이 일었다.
‘마로니 인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 완벽한 8등신, 아니 10등신 미인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주기 위해 이번에는 집안에 제대로 성한 천조각이 없을 정도로 이곳 저곳을 가위질해 대기 시작했다.
엄마의 눈을 피해 만든 비밀박스 속의 수많은 리본과 드레스들… 그것을 만들고 갈아 입히면서 느꼈던 포근함과 패션에 대한 동경심은 지금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으므로, 바비인형은 돌아 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일부로서, 영원히 가슴속에 침잠되어 있는 그리움 그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파리 안띠끄숍에서의 바비
그런데, 일전에 파리의 어느 안띠끄숍에서 바비인형이 어린시절 그모습 그대로, 비밀상자속의 옷들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낡은 레이스 드레스, 꽃무늬 원피스와 판탈롱…작은 헤어핀과 신발에 이르기까지 행거와 설합속에 꽉 차 있는 작은 옷들이 누군가가 얼기설기 엮어 놓은 꿈의 형태로 약간은 어수선하게 재현되고 있는 모습은 일종의 충격이였다.
게다가 조금만 더 감수성이 예민했다면, 왈칵 눈물을 쏟을 수 있을 만큼 그리운 추억들과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시절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란…
물론, 처음 미국에서 이 바비 인형이 탄생될 당시 파리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패션의 꿈을 재생하는 시기였으며, 미국에서는 그 프랑스 패션이 한창 꽃피워가고 있었던 이른바 오뜨꾸뛰르의 춘삼월 호시절이였다.
그리고 당시는 모두가 새로운 꿈을 이루려 했던 시대였으므로, 바비의 완벽하고 화려한 모습은 어메리컨 노스탈지어와 유럽패션의 꿈이 믹스되어 전세계로 확대 되어 나갈 수 있는 생명력 바로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왕짜증 캐릭터가 뜨는 시대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의 미의식은 좀 다르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캐릭터 보다는, 어딘지 우울하며 약자(弱者)의 인상이 강한 일명 ‘패배자(loser)’ 모습에 더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깜찍한 표정. 화려한 색상을 특징으로 하는 미키마우스, 키티, 혹은 바비인형류등의 캐릭터와는 전혀 딴판의 모습들.
예를들어 출시 두달 만에 인형 15만개가 팔렸다는 국산 캐릭터 엽기토끼(마시마로)의 경우,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녀석들까지 너끈히 제압하는 ‘무서운 놈’ 이긴 하지만 겉모습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같은 토끼 캐릭터인 워너 브러더스의 벅스 버니의 영리하고 날렵한 인상에는 근접도 할 수 없는 모습인데, 그나마 눈까지 감고 있어, 도대체 이 놈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조차 힘들다.
최근 네티즌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는 로이비주얼의 플래시 애니메이션 ‘우비소년’ 도 노란 비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그로테스키한 분위기의 주인공이다.
홑꺼풀의 작은 눈에 주근깨.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고 실수연발이다.
요샛말로 화끈하게 말하자면 ‘왕짜증’ 캐릭터다.
B급 문화의 상징…엽기
폼잡지 않고 ‘느낌대로 흥대로’ 한바탕 불러 제끼면 그만이며, 기존의 상식을 파괴하는 패션의 기이한 조합과 즉흥적인 애드리브, 익살 창법과 거칠게 반복 되는 사운드 랩 등에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처음 가요계도 당황했지만, “그런들 어떤가. 신나면 그만이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아예 손을 들어 버렸다.
영화계나 CF계에서는 이런 문화의 흐름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중문화의 조잡한 키치’라고도 하고, 일부에서는 최근 한국문화가 정신적 퇴행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하면서도, 그 개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족의 부재(不在), 일상성의 미학보다는 사소함, 그리고 죽음에 대한 집착, 강박적인 유머, 난무하는 가학과 엽기, 지나친 완벽은 위선이라고 매도해 버리는 요즘의 전반적인 사회 현상을 반드시 ‘일과성 현상’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패션의 또다른 돌파구
물론, 내 어린 시절의 절반을 차지했던 바비인형의 꿈과 요즘 유행하는 엽기 캐릭터들의 인기를 패션 트랜드적 의미로 풀어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손에 닿지 않는 세계에의 동경심을 상징하는 바비인형에 비해, 엽기 캐릭터에게는 분명 ‘나를 대변해주는 듯한’ 친근함이 있다.
게다가 엽기캐릭터는 젊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