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비즈니스] 프랑스
왕실패션 전유럽확대…트랜드 발신국 위상정립코코샤넬, 자유· 아름다움 추구한‘여성복 혁명’주도
2002-07-28 유수연
지금부터 20년전 크리스티앙 디올, 피에르 가르뎅, 이브생 로랑, 샤넬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에게 있어 화려한 동경의 대상이긴 했어도 일상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존재였다.
번쩍이는 패션잡지를 바라보며, 머나먼 파리의 화려한 사교계를 공상하는 것이 기껏이였던 이들의 이름은 오늘날에 우리들의 일상생활속에 깊이 파고 들어오고 있다.
최근 2~3년간 시장 개방, 수입 촉진의 발전에 힘입어 국내에 수입되는 고급 소비재는 급증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파리패션에 결부된 이들 브랜드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
거기에 이들 종류의 상품중에는 국내에서 라이센스 생산되고 있는 것도 많고, 이들을 포함해 매상은 급속하게 신장되고 있다.
이런 경향의 배경에는 물론, 사람들의 소득 수준이 향상되는 가운데, 소비자들의 니드가 다양화 되고, 보다 질높고 개성적인 이른바 ‘하이 그레이드 상품’을 추구하게 된 사정도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 파리 패션의 권위와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갖가지 상품에 활용하면서 세계시장에 판매한다고 하는 파리 패션 비즈니스의 오랜 노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파리의 패션 비즈니스는 이른바 소프트, 혹은 인지도에 따라 지탱되고 발전해 온 산업이다.
근대 공업의 발전을 지탱해 온 커다란 자본력, 고도의 근대기술, 효과적인 기계설비등은 그다지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물론, 오래전부터의 전통, 인간이 가진 우수한 창조력과 숙련된 기능, 거기에서 만들어진 권위와 이미지등이 커다란 부가가치를 창출해낸 원천이 되고 사업의 발전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 산업에서 주역을 맡아 온 것은 근대 공업을 주도해온 대기업들이 아니다.
재능과 아이디어가 넘치는 소수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숙련된 노동자들, 과대한 숫자의 중소 영세기업등의 역할이 압도적으로 중요한 시점에서, 현대 사회에서는 소프트, 혹은 지가의 역할이 높아지고, 산업의 발전에 있어서도 그 활용이 불가피했다고 한다.
이런 견혜에서 보면, 파리의 패션 비즈니스는 그 오랜 전통과 역사, 비근대적으로도 보이는 산업구조등에도 불구하고 현대 혹은 미래산업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겸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파리의 패션비즈니스의 과거와 오늘을 알아보기로 한다.
오뜨꾸뛰르의 역사
언제부터 파리가 패션의 도시로 불리우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패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6세기 특히, 프랑소와즈 1세(1515~47년 재위)하 프랑스 르네상스 즈음, 이미 파리의 궁중의복은 유럽각국의 복장의 유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6세기말에는 풍성한 옷단을 자랑하는 파리의 궁중의복이 유럽 각국의 왕가에 확산되었고, 일반 시민사이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에는 루이 14세의 재상 코르베가 추진한 중상주의하에서 프랑스의 섬유 패션산업이 급속한 발전을 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그때, 베르사이유 궁전이 유럽사교계의 압도적인 중심세력으로 부각, 복장의 유행을 차지하고 있던 파리의 역할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이미 파리의 의상계에서는 파리궁중 의상을 입은 마네킹들을 마차에 적재하고 유럽 각국에 돌기 시작하는 전문 판매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이 되자 파리의 복식을 소개하는 도면 (이른바 패션 플레이트)가 판매되고, 유행은 보다 빨리, 쉽게 전파되게 되었다.
또한, 그사이에 영국의 모직물 산업의 발전과 양복점의 우수한 기술이 플러스 되어 신사복에 관해서는 런던이 유행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파리는 여성복에 한해서 세계의 유행을 리드하게 되었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의 동난이 계속되었지만, 여성복 패션에서의 파리의 우위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편,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기간동안 파리의 유행으로부터 단절되어 아주 별개의 유행을 창출하기 시작했지만, 전쟁이 끝나 파리의 유행에 접하자마자 영국의 귀부인들은 아예 자국의 유행을 버리고 파리 그것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패션을 리드한 것은 의복을 만드는 꾸뛰리에(디자이너)가 아니면, 의복을 파는 의상점도 아닌, 오히려 고객인 귀부인들이였다.
예를들면 루이 14세시절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각각 왕좌의 힘으로 유행을 좌우했는데, 왕비 마리아 테레사와 왕의 애인인 만테논 부인, 루이 16세 시절에는 왕비 마리 앙토와네트, 그리고 나폴레온 1세의 시대에는 황후 조세핀, 나폴레온 3세경에는 으제니 왕비가 트랜드 메이커로 알려져 있다.
19세기중반쯤되어서 이런 고객과 디자이너 관계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일었다.
그 변혁의 중심인물은 영국인 꾸뛰리에 샤를르 웰트(Charles R w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