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재우고 활활 봄이 풀리누나…조능식

1999-03-03     한국섬유신문
▼새해─<무인년>이 밝았구나 싶더니 어느새 2월이─3월을 불러 들였다. “세월 참 빠르다”고 가슴으로 되새길 겨를도 없이 말이다. 운거산(雲去山)수귀해(水歸海)란 무상한 자연의 흐름을 인생 에 비유한 시귀라고 생각된다. 「구름은 흘러흘러 산으로 가고 물 또한 흘러흘러 바다로 가 누나」─. 자난 주말 책장속의 색바랜 책들을 우연히 뒤적이다가 겉표 지가 낡고 사가서 바삭바삭할 정도의 옛친구들이 펴낸 것을 손수 보내준 「시집」 「소설집」 「수필집」들을 대하고 더 욱 잔인한 세월의 무정함에 전율(戰慄)마저 느꼈다. 그리곤 떨어지고 헌데를 상처에 약바르듯 테이프로 뗌질했다. ▼그 중에서 지금 「한국예술원 회장」으로 있는 조병화(趙 炳華)등 몇 형의 귀엽고 예쁜 「시집(詩集)」도 그랬었다. 1956년 도서출판 「정음사(正音社)」에서 발간된 것들이다. 발행인은 조병화형이나 실타래子와도 무척 가까웠고 출판인 (出版人) 故 최영해(崔暎海 = 한글학자이며 독립투사였던 외 솔 최현배(崔鉉培) 선생의 장남·또한 의사이며 수필가로 한 때 낙양의 지가(地價)를 올렸던 최신해(崔臣海) 박사의 형님) 형의 입김이 서린 것들이어서 두루두루 지난 날의 추억으로 빠져들곤 했다. 조병화 시집 「사랑이 가기전에」와 「여숙(旅宿)」의 두 권 을 한숨에 훑어보니 감미로운 조시인의 <사랑이야기>가 그 대로 가슴에 와닿는 것만 갔았다. 우리나라 현역 시인들중에선 가장 많은 시집을 펴낸 조시인 은 학창시절에는 <럭비선수>였고 친구를 좋아해서 「두주 (斗酒)」를 불사했었다(지금은 건강을 생각해서 금주중). ▼조신의 아호(雅號)는 「편운(片雲 = 조각구름)」이다. 자신 을 하늘서 노니는 조각구름에 비유한 것인가─. ─어쨌거나 위 두 권의 시집중에서는 「봄」을 노래한 것이 몇 편있어 3월에 부쳐보고 싶어졌다. 다음은 「조춘(早春)」이라는 시다. 우울한 2월이 가누나 하늘과 땅이 활짝 풀리누나 까치집 같이 높은 맑은 유리창을 열고 자고 일어난 내 침대에도 솔개미처럼 먼 너의 눈에도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세월을 재우고 봄은 오누나 활활 봄이 풀리누나. 사랑은 없어도 꽃 술에 취해 봄에 밀려 너를 두고서도 나는 둥둥 떠 가누나. ▼이번에는 「봄은 밤으로부터 하늘로」라는 시를 읊어 보자 봄은 밤으로부터 하늘로 뭉게 뭉게 풀려 사라집니다. 참혹한 나의 밤이여 겨울이여 사라지는 세월처럼 여인들처럼 고운 눈썹으로 안녕! 사랑은 내 것이 아녀도 듣기만 해도 좋다. 선혈처럼 상처진 가슴 가슴에 가시꽃처럼 보얀 아지랑이 끼고 소식이 없는 마음에서 나비와 같이 하늘이 가까워 옵니다. 깊어진 마음의 골짜기로 술술술 눈얼음이 풀려내립니다. ▼조병화시인은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하지만 그림에 대한 조 예(造詣)도 심상치가 않다. 한국의 문인화적 분위기를 살린 유화(油畵)를 그린다. 그의 작품인 「시화(詩畵)」에선 그야말로 시속에 그림이 있 는 「시중유화(詩中有畵)」요─ 그림속에 시가 있는 「화중 유시(畵中有詩)」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