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론의 자성-나가노 동계올림픽……조능식
1999-02-23 한국섬유신문
▼국제적 스포츠 게임이 있을 때는 TV중계가 요란스럽다.
자기 나라 선수에게 보내는 승리와 <금메달>에의 기대때문
에 흥분하고 목청이 자기자신도 모르게 높아지게 마련이리
라.
지금은 퇴역했지만 196·70년대의 「임택근 아나운서」의 열
광적 스포츠중계의 명성은 청취자들을 매료하고도 남았다.
탁한듯 볼륨이 있는데다 구수한 그의 음성은 우리나라 선수
들의 <분전>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나갔고 심지어는 우리에게
<애국>과 <단결>을 심어주는 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특히 상대가 <일본>일 경우는 아나운서나 시청자가 한데 똘
똘(?) 뭉쳤었다. 오랜동안의 식민지 통치에서 받아온 좀처럼
씻어버리기 어려운 민족적 울분에서일것이 분명했다.
▼얼마전 2002년의 「월드컵」축구예선전에서 보여준 우리의
응원전들이나 TV중계방송의 열정은 대단(?)했다.
붉은 <응원복>으로 통일시켜 일사불란(?)하게 응원석을 메
운 「붉은 악마」라는 이름의 그들은 보통 관객이 아니라 전
선(戰線)에 출전한 용사(?)들을 방불케했다.
TV앞에 모인 국민들은 꼴이 터질 때마다 함성을 올렸고 「
승리」에 도취되어 어린애들처럼 기뻐날뛰었다.
-어떤 맥주집과 찻집에서는 승리를 축하하고 기쁨을 나누기
위해 하루동안을 무료로 손님들을 맞기도 했다.
승리의 대표팀 차범근 감독을 치켜올리는가 하면 CF의 모델
로 여기저기서 그를 스카웃하기에 바빴다.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팀이 승리아닌 패배의 쓴잔을
마셨을때는 과연 어떠했던가 싶어 씁쓸하지 않은것도 아니
다.
-문제는 <승리>이건 <패배>이건간에 「좀 더 의연(毅然=굳
세고 끄떡없음)」했으면 싶었던 것은 뜻있는 사람의 한결같
은 심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몇일전 일본 모일간지에 요즘 개최되고 있는 「나가노 동
계 올림픽」보도에 대한 「자가 비판적」기사가 눈길을 끌었
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요즘에는 나가노 동계올림픽보도의 절정시대(絶頂時代)를
이루고 있다.
신문이고 TV이고 「닛퐁 닛퐁 이겨라」의 온퍼레이드다.
일본의 <미디어>이니까 일본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論理)란 말인가-. 아니면 독자나 시청자의 관심이 <일
본>쪽에게만 쏠려 있다고 믿는 것일까-거의 모든 <보도진>
들은 일본선수와 일본의 메달획득수만을 쫓고 있는 것같다.
▼특히 아쉬운 것은 TV다. 세계1류의 참모습- 즉 뛰어난 「
기술」을 보고싶다는 간절한 생각인데도 <아나운서>나 <해
설자>는 일본편에만 서서 「실황(實況)」방송 일색을 펼치고
있다.
「국제화」라던가 <글로버리제이션>등과는 인연이 먼 세계
다.
이러한 근원은 틀림없이 「힘내 라 이겨라, 마에바타케(前畑)
」를 울부짖었던 1936년의 <벨린올림픽>에서의 그 유명했던
<라디오>의 실황중계.
원칙이라면 <방송>의 <중립성(中立性)」을 저버린 일본의
처사일터인데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온 「풍토」가 「일본방
송계」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리라.
▼또하나의 원인은 표창식의 국기게양이나 국가연주가 상징
하고 있듯이 올림픽은 <국위선양>의 마당이라는 이미지가
여전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개최자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시설하고 선수를
육성해온 셈이다. 미디어도 이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정은 알
만하지만 지나치고 노골적인 「일본 이겨라, 일본이겨라」는
결국 <역효과>라는 점을 속히 깨달아 줬으면 싶다”-.
▼-이상이 그 개요다. 이 신문기사에서 <섬나라 일본>이라
기 보다는 뭔가 대륙적 큰 기상을 엿보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 한번 뒤돌아 볼만 하지 않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