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 ‘권위주의적 발상과 카피’ 벗어나야
창조적 발상·인적 인프라 구축 관건
우리는 오래 동안 “하이패션(High Fashion)”이라는 용어를 자랑스럽게 써 왔다. 이 용어는 표현 그대로 럭셔리, 고급패션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사실 시대착오적인 발상과 맞물리는 개념이다.
계급사회가 존재했던 20세기 이전 귀족만을 위한 디자이너가 소위 ‘오트퀴트르’였으며 이를 두고 하이패션 디자이너라고 했다.
1880년대 프랑스 시민이 주도한 대혁명은 계급사회의 몰락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대중문화시대가 활짝 꽃 피었다.
귀족 한 사람만을 위한 하이패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현재 프랑스에서는 디자이너 작위로만 불러지고 있다. 1880년대 대중문화의 출발은 1960년대 프레타포르테라는 기성복 박람회, 즉 일반 대중을 위한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기성복 탄생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패션은 거대한 비즈니스 산업이 되어 인종과 문화, 그리고 국경을 불문하고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여기서 한국 패션산업의 문제점을 몇 가지 거론할까 한다. 한국 패션산업 내에 존재하는 진부한 하이패션 지향의 마인드가 국내 패션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미래를 어둡게 한다. 하이패션은 권위주의적 발상이 본능적으로 발현되는 영역이다. 한 사람만을 위한 디자인이기 때문에 독특하고 예술성이 강한 반면 대중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무분별한 카피다. 일본으로 홍콩으로 유럽으로 시장조사를 하며 남의 디자인을 자기 자신의 디자인인 양 마구잡이로 카피를 떠 돈벌이에 연연하는 것 역시 큰 문제다.
한국 패션은 권위주의적 발상과 카피, 이 두 부분을 빼면 아무런 감흥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 때문에 패션을 거론할 때 한국은 아시아에서 다섯 번째로 취급 받는 실정이다. 첫째가 일본이고, 홍콩, 대만, 싱가포르 그 뒤를 이어 한국을 언급한다. 한국 디자이너가 마케팅을 제대로 해 캐릭터를 개발하고 새로운 상품을 보여 주지 않는 한 한국은 중국이나 태국이나 말레이시아에게도 밀릴 것이 자명하다.
패션 인재양성의 부족 역시 문제점이다. 마케팅 개념의 상품 기획을 위해서는 인재(전문가) 인프라가 잘 구축되야 하지만 한국의 패션산업은 인재 양성이 잘 안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부터라도 현대사회에서 패션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인재 양
성이 시급하다. 인간 욕구 속에는 식습관의 다양성만큼이나 옷을 통해 표출하고픈 다양한 개성이 내재돼 있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늘 창조적인 발상으로 거듭 날 수 있는 인적 인프라가 구축돼야 패션 산업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강물이 항상 흐르듯 유행도 정지하지 않는다. 정지하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한국 패션산업은 너무 오래 동안 정지 해 있는 모습이다. 남의 것으로 유행을 흉내를 내는 것은 속빈 강정과도 같다.
패션은 문화다. 소비자의 내면세계 깊숙이 파고들어 고객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아내야 진정한 패션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세계 패션 5대 강국은 프랑스, 이태리, 영국, 미국, 일본이라고 언급된다. 그 기준은 한 나라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패션문화가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진정한 패션 리더국으로 인정받는다. 프랑스는 ‘오트쿠튀르’, 즉 ‘하이패션’으로, 이탈리아는 이탈리안의 혼이라는 시저가 착장했던 부드럽게 흐르는 분위기를 창조했다.
영국은 오랜 전통사회를 바탕으로 하지만 젊은이들의 거부와 저항으로 펑크 문화를 낳았다. 미국은 금전 만능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히피문화를 꽃 피게 했다. 일본은 뒤늦게 기모노에서 영감을 얻어 일본 디자이너의 세계진출 발판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가 서양 복식을 처음 접한 것은 1886년 외교관을 통해서였고 일본은 이보다 앞선 1881년 이었다. 한국에서 양장이 대중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50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였고, 일본은 1945년 2차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였다.
이렇듯 한국과 일본의 시작은 겨우 5년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오늘날 양국의 패션문화 격차는 30년 또는 40년 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다.
한국은 아직도 카피, 하이패션이라는 개념의 권위주의와 사대주의적 발상에 사로잡혀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업계 전반이 국내 패션산업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의지가 전무하며, 단순히 상업적인 논리로 패션을 논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아줌마들이 드라마 왕국을 만들었듯이 패션 한류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