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방직 창립 60주년 ‘축제의 한마당’

2012-11-04     김임순 기자

새로운 60년을 향해 ‘일신인의 상’ 선창으로 시작되다
3일 광주 화순 하이움 문화 스포츠 센타에서

일신방직(대표 김정수)이 창립 60주년을 맞아 화려한 축제의 한마당을 펼쳤다. 지난 3일 광주근교 화순의 하이움 문화스포츠 센타에서 열린 ‘창립 60주년 일신가족축제’는 선배들의 땀과 그들이 흘린 노고의 역사로 오늘의 일신이 있음을 재천명하고 다가올 새로운 60년을 위해 힘차게 도약 한다는 각오를 되새겼다.

김호경 이사의 사회로 개회를 선포하고 윤윤식 상무의 연혁보고와 김영호 회장의 기념사, 김정수 사장의 표창수여와 광주 1공장에서 일신인의 상을 선창하면서 행사는 시작됐다.

표창장은 우수사원 10명과 장기근속 사원 181명에게 수여됐다. 우수사원 수상에는 광주 1공장의 강미진 외 9명, 장기근속표창에는 근속 25년으로 양진성 광주 2공장 차장 외 6명, 근속 20년에는 김병문 광주 1공장 과장 외 9명이, 근속 10년에는 양숙희 광주 1공장 직원 외 26명이 근속 5년에는 이미숙 반월공장 사원 외 64명이, 근속 3년에는 생산직 여사원 72명 대표 수상자로 선정희 광주 2공장 사원이 수상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당당히 수행하면서 섬유산업의 대표주자로 굴림하고 있는 일신방직. 연도별 발자취만 보더라도, 앞을 향해 달려온 기업으로 오로지 품질 안정화와 선도적인 인력관리로 현재의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신방직은 타방의 해외진출 속에서도 굳건하게 국내에서만 시설을 갖춤으로 경쟁력을 높여왔다. 지난 1990년 초 대한방직협회 회원사의 총 방적설비가 약 370만추에 달했을 때 약 15만추 정도로 점유율이 약 4%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011년 7월 현재, 회원사 총 방적 설비가 약 115만추에 머무르고 있으나 꾸준한 설비개체 첨단화를 통한 생산량 증대 속에 시설은 약 19만추로 점유율이 약 17%로 뛰어올라 회원사 중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이러한 일신방직의 지속적인 생산 설비 확충과정은 생산기술, 판매시장, 노동시장의 변화를 적시에 반영한 차별화된 경영전략의 성과로 풀이된다. 특히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면방산업분야에 유일하게 매년 선정되고 있다.

일신방직은 탄생을 위해 창립이전부터 창업주의 꾸준한 노력과 시장 개척정신 국가 위기 때에는 헌신적인 경영이라는 발자취를 남겼다. 1935년부터 1950년, 그 이후 일신방직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처한 현재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그들의 활동상과 안방까지 밀려오는 세계화속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색해야겠다.

다음은 연혁에서 밝힌 일신방직 60년 발자취(1951년~2011년)이다.
▲1935년 9월 종연방적(鐘淵紡績)광주공장
광주 1공장은 1935년 일본 방직업체가 국내 진출해 운영된 공장이다. 종연방적 광주공장은 전남지방이 목화산지며, 자가발전이 용이한 화순탄광이 인접한 좋은 입지여건의 공장으로 방적기 3만5,000추, 직기 1,440대, 직원 3,000명으로 국내 최대규모였다.

▲1945년 10월 전남방직공사 출범, 11월 김형남 이사장 취임
광복 후 조선실업 공사 산하 전남방직공사로 출범, 김형남은 관리인 대표로 임명, 이사장에 취임한다. 공장가공이 난항을 겪으면서 기술서적을 번역, 부품을 제작, 기술자를 양성해 가면서 가동률을 올렸다.

▲1946년 2월 산업선교의 효시 전방교회 설립
해방정국의 혼란한 사회상이 산업현장에까지 스며들어 정상조업이 쉽지 않았다. 기독교 신자인 김형남은 임직원들이 상호신뢰와 믿음을 신앙심으로 키우기 위해 1946년 공장 내 ‘전방교회’를 설립, 산업선교의 효시가 된다.

▲1950년 8월 한국전쟁 폭격으로 광주공장 파괴
전쟁직후 광주가 함락되기 직전, 면포 5만 필을 부산으로 옮겨 군복제작용으로 공급한다. 공장은 전쟁발발 1개월 만에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고, 일부 영남지방 공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파괴된다.

▲1951년 11월 전남방직공사 불하· 1953년 2월 전남방직(주) 출범
정부의 ‘귀속재산처리법’에 따라 불하 받았다. 사장에 김형남 등 경영진을 구성, 법적인 절차를 거쳐 1953년 2월 전남방직주식회사로 출범했다.

▲1961년 1월 회사분리에 따라 4월 일신방직주식회사 재탄생
1960년 3.15 부정선거, 1961년 4.19 혁명 등 사회적 갈등 속에 노사분규에서 출발해 경영층에 까지 비화되자 효율적 경영을 위해 회사를 양분, 김형남은 새로운 상호인 ‘일신방직주식회사’로 분리 독립 재출범한다.

▲1973년 5월 한국증권거래소 주식 상장
회사 재무구조를 튼튼히 하고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업공개를 결의, 1973년 5월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975년 1월 김창호 대표이사 사장
1961년 입사해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창호가 1972년 12월 이사로 취임했다. 세계적인 섬유수요의 증가추세에 발맞춰 수출중심 경영으로 갖춰가면서 1975년 1월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다.

▲1978년 6월 창업자 김형남 별세
전남방직공사 이사장, 전남방직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일신방직주식회사 회장에 오른 창업자는 1978년 6월20일 별세했다. 대학재건 초창기부터 관여해 이사장과 총장을 거쳐 온 숭실대 학교장으로 치러지고, 1980년 4월 광주공장 형남동산에 동상이 건립됐다.

▲1982년 3월 김영호 대표이사 사장 취임
1973년, 1975년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변기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성장기반을 다져간다. 김영호 사장은 1974년 입사후 1977년 부사장, 1979년 대표이사 부사장을 거쳐 1982년 3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다.

▲1983년 5월 임동 사원아파트 기공
사원 복지 핵심 사업으로 사원아파트를 확충한다. 1982년에 준공된 30세대의 운암동사원아파트에 이어 1983년 60세대의 임동아파트 착공, 1984년 준공한다. 1990년 31세대 규모의 운암동 2차아파트를 준공했다.

▲1984년 12월 반월 염색공장 준공
자가 염색시설을 갖춰 방적제품에 대한 품질향상과 안정적인 제품공급을 위해 반월염색공장을 준공한다. 연간 1,500톤 규모의 사염시설은 1989년 12월 연간 3,000톤 규모로 증설되고 1993년에는 포염 시설까지 갖춘다.

▲1991년 4월 청원공장 준공
1987년 광주 방적 2공장 자동화설비 이래 제품의 신속한 공급을 위한 물류관리 측면까지를 고려한 새로운 공장의 건설을 모색하면서 충북 청원에 5만추 규모의 코마사 전문생산공장을 1989년 4월에 착공한다.

▲1991년 8월 여의도 일신빌딩 준공
1975년 확보된 여의도 부지에 사옥을 건축해, 1991년 6월 입주 후 8월 준공기념식을 갖고 일신가족의 본격적인 여의도시대를 연다. 일신빌딩 문화부 도시환경문화상, 서울시 건축상, 한국건축가협회상 수상했다.

▲2001년 2월 김정수 대표이사 사장 취임
1993년 입사후 1997년 부사장을 거쳐 2001년 2월에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다. 김영호 사장은 대표이사 회장으로 경영체계를 새로운 세대로 재구축하고 2001년 11월3일 창립50주년 기념 전임직원이 한자리에 모인 ‘일신가족축제’를 열었다.

▲2011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면방1위(6회 연속)
일신방직은 면방 산업 조사를 시작한 2005년부터 2011년까지 산업별 면방부문에서 6회 연속 1위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