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예술인들의 ‘질풍노도’시대 ‘전위예술’꽃피다

2013-08-24     편집부

직결재판에 회부된 손일광을 비롯 ‘제 4집단’의 주요 멤버들은 이날 젊은 판사를 통해 “한국의 희망찬 미래를 봤다”고 회상했다. 당시 인기 주간지 였던 ‘선데이 서울’에는 <관(棺)메고 예술하니, 경관이 ‘웃기지마!’>라는 제목으로 그때의 상황을 이와 같이 게재했다.

“스물다섯번째 광복절인 한낮, 태극기와 백기 그리고 꽃관을 들고 ‘문화의 독립’을 외치며 한강으로 향하던 ‘가칭 제 4집단’ 소속 9명의 장발족들은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한강 아닌 즉결재판소로 행렬의 ‘코스’가 빗나갔다”고 적고 있다.

광화문 파출소에서 순경이 뛰어나와 관을 들고 오는 손일광과 정강자에게 다가와 “이게 뭐냐”고 묻자 손일광은 “국립묘지에 헌화하러 갑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경관이 발로 관을 건드리자 “작품을 함부로 다룬다”며 오히려 항의를 했다. 오후 2시 5분 경찰 트럭에 오른 멤버들은 한강이 아닌 남대문 경찰서로 직행했고 조사를 받고 하룻밤을 보호소에서 보냈다. 이튿날 즉결 재판소로 넘어간 이들은 소신있는 젊은 판사를 만나게 된다.

“왜 도로를 점령하면서까지 해프닝을 벌였냐?”고 묻는 판사의 말에 “일본 앞잡이가 더 잘사는 사회는 모순이다. 그들의 충견으로 조국을 배신한 이들이 지금도 득세하고 있는 현실을 ‘개꼬리’ 장례식으로 표현한 것 뿐”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관(官)의 힘은 민중에게는 위협적인 정도였다.

제 4집단은 검사가 ‘4차원 정신세계’를 가진 자신들의 해프닝을 이해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우려를 완전히 뒤엎고 젊은 판사는 은근한(?)격려의 메시지까지 남기며 선처(?)를 했다. “자기분야에서 소신껏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열심히 하십시오!”라며 ‘훈방조치’를 한 것이다. 손일광 선생은 “ 훈방조치를 받아 나오면서 현실은 암울해도 앞으로 대한민국은 발전된 사회를 이룰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가난한 예술가 품은 ‘은성 막걸리집’
손일광 선생은 인터뷰할 때마다 명동의 술집 ‘은성 막걸리집’을 떠올리곤 한다. 예술인들이 항상 모여있던 이 곳은 잘 알려진 대로 연기자 최불암의 모친이 운영했었다. 기다란 나무의자에 막걸리와 두부전이 전부였지만 항상 가난한 예술가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인 곳이었고 손일광 선생을 비롯한 지인들의 ‘만남의 장소’였고 ‘제 4집단’에게는 제 2의 고향처럼 모태가 됐다.

기자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최면에 걸려 종종 막걸리를 마시며 ‘취중(?)인터뷰’를 하곤 했다. ‘취중 진담’이란 말을 믿어보고 싶지만 혼자만의 ‘눈빛’과 ‘웃음’으로 표현하는 4차원적 손 선생의 언어를 이해하는데는 상당한 무리가 따랐다.

68~79년 제 4집단 활동 전성기
新사고와 토론…‘해프닝’ 벌여
언론·기관의 ‘관심(?)’ 한 몸에

이때 명동은 대로변을 차지하고 성업을 했던 큰 양장점들이 사양길을 걸으며 사라지고 우후죽순으로 디자이너샵 개념의 ‘살롱’이 촘촘히 들어서기 시작했다. 67년부터 디자이너 손일광은 의상실 ‘A.D(아방가르드)’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전편에서 서술한 바 대로 정찬승, 김구림, 정강자, 방태수(방거지) 등 전위예술가들을 만나 그 유명한 은성 막걸리집을 드나들게 됐다.

전편의 소개에서 빠졌지만 화가 정강자는 가수 남일해 씨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대표적인 여성 전위예술가로 활발하게 활동한 유명인이었다. 68년 ‘제4집단’ 결성 후 79년까지 벌인 해프닝들은 기자들도 바쁘게 했다. 지금은 연예뉴스가 대세이지만 당시는 획기적 소스가 부족했던 터라 제 4집단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든 주간지에서 최대한 빨리, 많이 취재하고 싣기 위한 경쟁이 붙을 정도였다.

억압받던 세상에서 자유표현이 분출하려던 시기, 손일광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했다”고 한다. 지난편에 잠깐 소개한 대로 백남준이 보낸 서신에 영감을 받아 정찬승과 서울미대출신의 여성모델이 실현한 행위예술은 명동에서 ‘한바탕 난리’를 벌이게 했다. “나의 감정을 오선지에 가둘 수 없다.

이 그래프대로 표현해 달라”며 그래프로 표현한 편지를 보고 남녀가 피아노위에서 사랑을 나누며 몸짓으로 건반을 울릴 때 그 원초적인 음악이야 말로 가장 순수하다는 영감에서 비롯된 행위예술이었다. ‘미풍양속’의 규범을 무시할 수는 없어 커튼을 치고 여성의 허벅지 아래만 보여주며 벌인 ‘해프닝’을 손일광은 ‘관념타파’의 운동이었다고 결론짓는다.

비가 오면 맨발로 명동을 걷는 디자이너 손일광은 이미 명동의 주요인물(?)이 됐다. 제 4집단의 모임과 해프닝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감시의 눈길’은 커져가고 집요해졌다. 내사도 받고 미행도 당했다. 손일광을 비롯 주요멤버들의 당일날 예정된 행적과 심지어는 술마시는 장소까지 조사하고 이미 알고 있을 정도로 철저한 관리대상이 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도 있었다. 가까운 지인 중 한 사람이 내부고발자로 알려져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들이 항상 틀을 벗어나 초월한 손일광에게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