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최초 남성디자이너 그룹 ‘코패드’ 결성…정기 그룹전 개최
‘한국형 패션쇼’ 기본 룰 만들어
하용수 ‘음악·헤어·워킹’ 등 연출
“알아서 하되 멋있으면 OK”
88올림픽 개막식 날 디자이너 손일광이 선보인 로봇의상은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레탄폼에 플라스틱판을 붙이고 금속코팅을 했으며 가슴에는 작은 TV모니터를 붙였다. 개막식에서 로봇의 가슴에 달린 모니터를 통해 생방송이 진행되는 기발함을 과시했다. 사실 로봇형태의 전위적 의상 외에 디자이너 손일광은 한강 둑을 컨버스 삼아 올림픽 참여국가의 국기를 형상화해 잠실운동장까지 연결하는 퍼포먼스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로봇의상을 디자인한 후 나중에 조직위원회에 이야기했더니 “왜? 진작에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아쉬워했다고 회고한다. 손일광 선생의 생각은 이러하다. “의상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디자인’은 적용된다. 넓은 사물에 디자인을 입히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생각이 생활과 같아야 예술이고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관념만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려고 세면대에 서 있으면 “왜 수도꼭지는 정방향으로 있을까? 얼굴 옆 양방향으로 만들면 안됐을까?”라는 의문을 시작으로 하루종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데 아이디어가 화수분처럼 쏟아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역사의 시작
한국 최초로 남성디자이너 모임인 코패드(KOFAD)가 결성됐다. 디자이너 손일광은 물론이고 김태산, 김동준, 방동규, 이동수, 이원재 등 10여 명의 남성 멤버들이 회원이 됐다.
이 중에서 ‘방동규’는 파리 소르본느 대학을 나와 귀국한 뒤 충무로 3가에 패션살롱‘방동규의상실’을 냈고 디자이너로 활약했다. 손일광 선생은 방동규를 당시 ‘대한민국 3대 입담’의 주인공으로 백기완, 황석영, 방동규를 손꼽을 만큼 화려한 언변의 소유자였다고 기억해 했다.
방동규의상실을 운영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던 디자이너 방동규는 입담 만큼이나 인생에 대한 많은 의문과 자아성찰로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영혼이 맑고 순수했던 그는 마침내 산으로 들어가 시골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야학을 하며 생을 보냈다는데 지금도 손일광 선생이 가장 많이 보고 싶어하는 친구 중 한 사람이다. 디자이너 이동수가 막내로 들어와 활약을 했다. 남성디자이너들이 그룹전을 할 때마다 이동수의 작품은 항상 두드러졌다.
손일광 선생은 “이동수의 작품은 당시 상업화하기 좋은 규격화된 의상이 많았고 시스루룩을 소개해 인기가 높았다”고 회고했다. 진주에서 올라온 반듯한 청년 이동수는 일에 대한 열정만큼 주량도 대단해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주당’이었다. 나중에 동마산업을 설립해 고급 골프캐주얼의 대중화에 한 몫을 했다.
매년 그룹전을 개최하면서 패션인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남성디자이너그룹의 명성을 높여갔다. 디자이너 이원재는 나중에 합류하게 됐다. 이원재(前 이원재패션 대표)역시 한국의 고급부인복 시장을 선도한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코패드멤버 중 이동수, 이원재는 상업화를 실현하고 시장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엔터테인먼트 태동
코패드는 5년간 활동을 했는데 이들의 그룹전은 패션쇼가 드물었던 당시에 새로운 이벤트의 틀을 형성하는데 표본이 됐다. 코패드의 그룹패션쇼에서 음악과 연출을 맡은 이가 바로 ‘하용수’라는 인물이다.
하용수는 배우로 활동하다 국제복장학원에 입학해 1969년 졸업했다. 하용수는 영화, 의상, 미술, 음악 등에 독특하고 탁월한 감각이 있었으며 특히 패션쇼의 음악을 연출할 때 정확하게 컨셉을 읽어내고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 후 엔테테인먼트로 많은 활약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만 해도 패션쇼가 흔치 않아서 개최만으로도 큰 이슈가 돼 모델들도 자신의 홍보를 위해 적극 참여할 때였다. 글로벌스텐다드한 패션쇼의 룰을 잘 몰랐던 때여서 ‘알아서 하되 멋있으면’ 돼는 기준이 적용됐다. 옷은 서구적이고 음악부터 워킹, 헤어 등은 한국적인 언밸런스하지만 멋스런 그룹전이 연출됐다.
전편에서 언급했듯 손일광 선생은 남성디자이너 모임인 ‘이목회’를 아직까지 이끌고 있으며 20여 명의 회원 중 모일 때마다 15명 이상이 착실한 출석률을 보이고 있다고 자랑한다. 남성디자이너와 당시를 주름잡던 기자와 모델 출신 등 그야말로 각 분야에서 생생한 역사를 가진 인물들이 참가한다. 명동일대의 술이 부족할 만큼의 ‘말술’을 자랑하던 청년이었던 이목회회원들은 여전히 강건(?)함을 자랑하며 주량을 지키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