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2주년 특집] 성수동 구두공장, 제화산업 안에서 정체성 찾아라
인력 양성 앞서 브랜드·유통·소비자 인식 전환 필요
그러나 성수동의, 성수동을 위한, 성수동에 의한 많은 기획들은 어쩐지 패션업계와 동떨어져 보인다. 성수동이 국내외 제화 업계와 유통, 교육기관과 긴밀하게 소통하지 않은 채 마치 외딴 섬처럼 홀로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친숙한 브랜드를 통해 성수동의 수제화를 접해 왔다. 성수동은 토종 살롱화 브랜드가 백화점 유통을 장악하면서 함께 전성기를 맞았으며, 해외에서도 디자인과 품질을 인정받은 디자이너 슈즈 브랜드 탄생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성수동의 현황과 전망을 관련 제화기업 및 유통과 함께 돌아봤다.
브랜드와 유통, 성수동 안과 밖은?
성수동은 제화 기업 본사와 제조 공장, 가죽과 각종 부자재를 생산 및 유통하는 도매상점들이 밀집되어 있다. 성수동 길 안에는 가죽은 물론 금속과 섬유 장식을 판매하는 도소매상이 늘어서 있고, 성동토탈패션지원센터와 성동제화협회 쇼룸 겸 직판매장에서는 성수동 여러 공장에서 자체 디자인 및 생산한 제품을 선보인다. 최근에는 서울디자인재단이 2호선 성수역을 구두테마역으로 꾸미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성수동은 구두제조의 핵이면서 한국 수제화 산업의 중요한 톱니바퀴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고품질 구두를 제조할 수 있는 제화 타운 중 하나로, 90년대부터 ‘탠디’와 ‘소다’, ‘미소페’ 등 유명 살롱화 제품을 생산하며 한국 고급제화 산업의 밑바탕이 됐다. 여기서 만들어진 수제화는 브랜드 이름을 덧달고 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가, 1족당 판매가 5만 원이었던 80년대 빅 3 백화점에서 월 4000만 원대 매출을 거뒀다. 최근 국내외에서 감각을 인정받고 있는 대부분의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도 성수동에서 생산되고 있다.
세라제화는 디자이너 가스파 유케비치 여성복 컬렉션의 슈즈를 디자인 및 제작하고 국내 협업 제품을 출시한 바 있으며, 바바라앤코의 ‘바바라’는 명동 등 서울 매장에서 일본 등 아시아 관광객의 인기에 힘입어 일본 매장을 오픈하기도 했다. ‘슈콤마보니’ 등 1세대 디자이너 슈즈 브랜드 이후 많은 브랜드가 성수동에서 제품을 만들어 런칭했고, 유럽 등 해외 수주회에서 디자인과 품질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제화시장에서 살롱화 브랜드들이 입지를 다지고 슈즈 디자이너들이 국내외 주목을 받는 동안, 성수동의 구두제조 환경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외부와 단절된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구두 제작이 난이도 높은 전문 기술임에도 공임이 높지 않았고, 성수기에만 밀려드는 주문에 생산 스케줄도 맞추기 어려웠다. 좁고 어두운 지하에 본드 냄새가 가득한 공장은 환기와 통풍이 잘 되지 않았다.
젊은 세대가 제조 산업을 기피하면서 수 십년 간 새로운 인력이 공급되지 못했고, 오랫동안 일해 온 기능공들은 일흔 넘어서도 아직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열악한 환경이 바뀌지 않으니 구두공장과 기능공들은 ‘명품’이나 ‘장인정신’을 키울 수 없는 여건이었다. 구두제조업계에 40년 이상 몸담아온 전태수 실장은 “성수동에서 탄탄한 이론과 지식을 바탕으로 패턴부터 재단, 봉제와 갑피, 저부를 해낼 수 있는 기능공은 20명이 채 안 될 것”이라며 “국내 여러 교육기관이 있지만 기술이 뛰어난 기능공도 후진 교육에 나서기는 어려운 실정이어서 기술자 양성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수동 위기에 대안 찾는 살롱화
성수동의 구두공장들은 고급 여성구두 ‘살롱화’의 붐과 함께 성장했다. 살롱화 브랜드들은 70년대 명동에서 시작돼 90년대 백화점 유통을 중심으로 대형 제화기업으로 성장했고, 성수동 구두공장들은 지금도 많은 살롱화 제품의 생산을 도맡고 있다. 그러나 연 1천억대 매출을 거두며 국내 제화 시장 매출을 주도하고 있는 탠디와 DFD는 이미 성수동을 떠나 독자적인 생산 라인을 구축한지 오래다. <사진 좌 : 성수동 구두공장 마롬에서 전태수 실장이 구두 라스트에 테이프를 붙이며 패턴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구두업계 43년 경력의 전 실장은 88년경부터 구두교육을 행했으며 최근에는 공장에서 여러 브랜드 제품의 개발을 맡고 있다. 그는 곧 자신만의 교육장과 맞춤 구두를 만드는 공방을 마련할 예정이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탠디는 하도급 공장들을 성수동에서 본사가 위치한 관악구 봉천동으로 옮겨 독자적인 생산 라인을 갖췄다. 아직 기능공이 갑피와 저부 등 한 켤레를 완성하는 수제화 제작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나 향후에는 미싱, 본드칠 등 작업을 나눠 생산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할 것으로 전망된다. 탠디 문성근 상무는 “긴 숙련 과정이 필요 없이 단순 작업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며 “남성 드레스 슈즈는 하남과 성남에 기계 공정 라인을 갖춰 기성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DFD그룹은경기도 광주 쌍용동에 제2사옥을 마련하고 연구소와 공장, 쇼룸, 컨벤션홀을 갖췄는데, 이미 생산량이 성수동에 몇 안 남은 하도급 공장 생산량을 웃돌고 있다.
대형 제화기업들은 중국 등 아시아는 물론 이탈리아 등 유럽 생산도 모색해 보고 있다. 최근 중국 경기가 좋지 않은 편이어서 예전 1천족 주문도 상대하지 않던 공장들이 500족 단위에도 생산에 기꺼이 응하고 있다. 퀄리티도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일본 등 고급 브랜드의 오더를 받아들이면서 기술을 쌓았고, 이탈리아 등 유럽산에는 못 미치나 국내보다 좋은 구두 부자재를 합리적인 가격에 구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그동안 가격 저항에 부딪쳤던 이탈리아 제조공장들도 합리적 가격을 맞출 수 있는 저가 생산 라인을 개발하는 등 경쟁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기술과 규모를 갖추고 글로벌 시장에 대응하는 이탈리아, 중국 등 구두 제조국에 비하면 성수동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수동은 국내 트렌드와 사이즈에 즉각 대응을 하고 좋은 퀄리티를 냄으로써 내수 시장에서 강점을 잃지 않고 있다. 만약 성수동을 기반으로 한 국내 제조 브랜드가 무너지면 중국 등 제3국 생산의 값싼 기성화가 물밀듯이 들어올 것이라는 전망이다.
글로벌 나아갈 디자이너 슈즈 모태
한국 디자이너 슈즈는 태생부터 성수동과 함께 한 브랜드가 많다. 그들 대부분이 브랜드 프로모션 및 디자인실을 거쳤거나 공장에서 견습하며 쌓은 노하우로 브랜드를 런칭했기 때문이다. 인지도 높은 브랜드들은 자리를 잡아 대기업과 손잡고 유통을 확장 중에 있으며, 이외 브랜드들은 자신의 매장을 전개하는 동시에 신세계 강남점 등 각종 셀렉트샵을 통해 유통하는 곳이 많다.
대표적인 편집매장 ‘신세계 디자이너 슈즈 편집샵’은 현재 7개 브랜드가 입점 되어 평균 월 7천만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독특한 디자인으로 특정 소비층의 관심이 높고 고객 충성도가 타 브랜드 대비해서 높다.
디자이너 브랜드를 소비할 수 있는 고객층이 많은 상권이 적으나, 해외에서는 감성이 잘 맞고 밸류가 높은 유통에 입점하기도 한다. ‘플랫아파트먼트’는 2011년 추동부터 파리와 도쿄의 트레이딩 뮤지엄 꼼데갸르송에 한정판 제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도쿄 이세탄백화점에 2013 S/S, 홍콩의 바우하우스에 2012 A/W부터 입점하고 있다.
이광섭 대표는 “일본에서는 브랜드를 소개 및 유통하는 디스트리뷰터가 있고, 2011년 추동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입점매장 숫자와 판매율이 늘고 있다”며 “일본 디스트리뷰터의 경우 먼저 연락이 왔고, 다른 나라의 숍들도 거의 먼저 연락을 줬다”고 밝혔다. 최근 1년간은 파리에서 열리는 페어 ‘프리미어 클라쎄’에 참가하는 등 브랜드를 알리며 유럽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더스티모브’ 장희주 대표는 “예전에도 성수동 공장에 수출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일본에서 하청 주문이 부쩍 늘어, 디자인과 품질에 까다로운 일본 소비자를 충족시킬 수 있는 퀄리티임을 알 수 있다”며 “최근 코트라를 통해 출전한 홍콩패션비즈에서는 ‘더스티모브’ 등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가 참가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고 말했다.
워크오브케이로 프랑스 파리 쇼룸과 온라인을 통해 한국 브랜드를 소개하는 쟌 보스코는“한국 디자이너 슈즈는 성수동 구두공장이 만드는 구두의 품질도 유럽에서 고급품으로 취급해도 손색이 없다”며 “한국 내수 시장에 머무르기 보다는 한국 디자이너 슈즈의 값어치를 알아보는 전 세계 시장에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