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Interview] ■ 서한집 (주)대한패브릭 사장 - “명실상부한 ‘안감 메카의 꿈’ 무럭무럭 커간다”

2015-10-06     전상열 기자
안감 수요 무궁무진…제품 고급화가 과제
협력업체와 ‘상생의 묘’ 살리면서 설비투자
직수출 강화…안감을 황금알 낳는 거위로


“안감 수요는 무궁무진합니다. 문제는 수요창출 방법이 아닙니까? 앞으로 고급시장을 겨냥한 생산·판매를 강화합니다. 실력도 쌓았는데, 그 힘을 더 크게 발휘해야죠. 수출도 확대할 생각입니다. 광활한 중국시장이 있지 않습니까?”

안감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삼아나간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도 이 목표는 흔들리지가 않았다. 미래의 꿈은 더 크고 야무지다. 고급 안감수요를 겨냥한 생산·판매다. 스타트는 이미 끊었다. 10월6일부터 11월 말까지 4차례에 걸쳐 자직체제 구축에 들어간다. 환편 공장 이전에 이어 쟈카드 도비 평직 등 직기 60대 투자다. 안감의 최강자 서한집 (주)대한패브릭 사장(46)의 승부수다.

쌓아 놓은 원단만 1600만 야드에 이르고, 거래업체는 1000여 곳이 넘는다. 1만3000여 칼라 수에, 롯트별 관리는 무려 2만 여 가지가 넘는다. 하루 평균 17만 야드 원단 판매가 이뤄지고, 생지 보유량은 최소가 600만 야드다. 연간 원단 판매량은 3500만 야드를 웃돈다. 숫자로 본 (주)대한패브릭의 비즈니스 역량이다. 이곳이 왜 ‘안감의 寶庫’라 불리는지 쉽게 이해를 도왔다.

지난 9월26일 기자가 찾은 (주)대한패브릭. 동대문종합시장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충신시장 입구에 지하 2층, 지상 9층 규모로 자리한 대한패브릭 사옥 대한빌딩은 전체가 원단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사옥 1층에서는 출고와 입고 원단으로 분주하기가 그지없었다. 각 거래업체로 실어내는 안감과 협력공장에서 생산한 안감이 톱니바퀴처럼 쉴 틈 없이 맞물려 나가는 장사진의 현장이었다. 모두가 불황이라고 아우성을 치지만 이 곳만큼은 달랐다. 국내서 생산되는 안감, 이곳을 거치지 않는 게 없을 정도다. 진진 세진직물 영보직물 등 국내 내로라하는 안감명가 제품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부터 과제는 안감의 고급화입니다. 협력업체를 통해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자체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트렌드를 리드하는 안감의 고급화, 안테나 역할이지요. 이에 맞게 자체제직 생산량은 총 거래물량의 10%를 넘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서 사장은 올해 2월 전라북도 순창에 9256.19㎡(약 2805평) 규모의 환편공장을 인수했다. 안감의 고급화를 겨냥한 포석이었다. 애초 30여 대에 이르는 환편기는 처분하려했으나, 안감의 고급화는 최종적으로 아웃쉘 진출의 맥락과 같이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또 환편기도 일반 기종이 아닌 다양한 사이즈의 광폭용이었다. 니트를 아웃쉘 시장 진출의 시험대로 삼아나가자며 생각을 바꿨다. 공장내 서브 동으로 환편기 생산라인 옮기는 작업에 나섰다. 환편기 라인은 지난 10월1일 가동에 들어갔다.

“오늘(6일)부터 4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직기 설치에 들어갑니다. 이 공장에 설치되는 직기는 쟈카드 30대, 도비 20대, 평직 10대 등 총 60대예요. 모두 중국 인춘산 투 노즐 워터젯트룸입니다. 중국산 직기는 가격이 싸기 때문에 성능이 떨어진다는 선입관을 갖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미세한 부분까지 잡아내는 기본적인 성능은 선진국 산 기계와 비교해도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는 자직체제 구축에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또 자직체제는 협력업체를 위협한다기보다 함께 상생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말했다. 자체 생산은 총 물량의 10%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나 안감의 고급화에 따른 시행착오 리스크를 스스로 짊어진다는 각오가 그것이다. ‘안감의 메카’를 향한 그의 행보가 본격적으로 3라운드를 맞았다.

지난 1991년 7월14일이었다. 21세의 청년 서한집은 친구를 찾아 서울나들이에 나섰다. 이게 그의 운명을 바꿔놓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는 이미 산림조합에 취업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친구는 동대문시장 내 그의 외삼촌이 운영하는 포목점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친구를 도와 외삼촌의 일을 거들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친구가 가게 장부를 보여줬다. 놀라웠다. 당시 친구 월급이 20만 원이었는데 가게의 하루 수익은 60만 원이 넘었다. 노다지가 보이는 신천지였다. 눈이 번쩍 떠졌다. 숙명이었나? 24년 섬유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동대문시장에서 6년간 안감 심지 패딩 등 비즈니스를 갈고 닦았다. 1997년 11월, 자본금 1000만 원으로 2평짜리 매장을 열고 홀로서기에 나섰다. 그런데 독립하자마자 IMF사태가 터졌다. ‘나라가 망하면 나도 망한다’는 생각에 “대한민국을 살리자”는 의미를 담아 상호를 대한상사로 내걸었다. 시련을 알리는 징조였던가. 이듬해 9월 중순 2억7000만 원에 이르는 부도를 맞았다. 당시 연 매출은 3억 원 남짓했다. 청천벽력이었다.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는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인복이 남달랐다. 주문이 끊이지가 않았다. 주위의 친구들도 거래처 소개에 앞장서 줬다. 부도를 맞으면 재기가 여의치 않아 대부분 손을 떼는데…. 2004년, 6년간에 걸쳐 빚을 청산했다. 6년의 시간은 분노를 삭이는, 자존심을 내려놓는 인성으로 바꿔놓았다. 또 협력업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경영철학까지 뿌리내리게 했다. 섬유의 길 1라운드 14년간은 희망과 시련이 교차하는 시험대였다.

“성실과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몸에 배게 했습니다. 주위에서 내가 한다면 모두 도움을 줬는데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도 같은 불의의 사태는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시련과 고통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래하는 모든 분께 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했습니다. 안전장치 차원이지요.”

빚 청산을 끝내자마자 사업은 탄탄대로를 치달았다. 2006년 대한상사를 (주)대한패브릭으로 상호변경과 함께 법인으로 전환시켰다. 연 매출은 20억 원에서 1년 뒤 50억 원으로, 또 1년 뒤 100억 원으로 3∼4년 간 더블 성장을 지속했다.

올해 매출은 300억 원을 넘길 전망이다. 욱일승천의 기세가 따로 없었다. 최고 제품 안감개발을 위해 디자인과 R&D 비용으로 연간 3억 원에 이르는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친환경 안감 비스터, 엘씨(Like Cotton)시리즈나 기능성 나노원단 넥스츄어와 발열원단 With Heat는 이의 산물이다. 원단 창고가 16곳으로 늘어났다. 생지 협력업체는 고은텍스를 비롯 5곳, 염색 협력업체는 진진을 비롯 4곳 등 네트웍 체제를 탄탄하게 다졌다.

2012년 대지 615.90㎡(약 187평)위에 연면적 3496.24㎡에 이르는 자체사옥 건립에 들어가 2013년 11월9일 준공식을 가졌다. 신사옥 건축비로 90억 원을 투자했다. 자체 사옥 준공과 함께 16곳에 이르는 창고를 한 곳으로 집중화시켰다.

자체적으로 ERP 통합관리시스템 개발에 나서 본사 물류센터와 동대문시장과 광장시장에 마련된 전시판매장의 모든 제품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하는 등 원단관리에 효율성을 배가시켰다. 품질경영시스템(ISO9001)과 환경영영시스템(ISO14001) 인증을 받는 등 고객만족과 신뢰를 주는 행보에 앞장섰다. 자연스럽게 자체 안감 브랜드 ‘에이플러스(A+)’가 안감의 고유명사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섬유의 길 2라운드 8년간은 거칠게 없는 질풍노도의 진군이었다.

“찾아오는 바이어는 맞지만 찾아가는 비즈니스는 하지 않았어요. 국내 협력업체와 함께 산다는 차원입니다. 그렇지만 수출에서는 달라요. 탄탄한 제품력을 앞세워 적극적으로 중국과 유럽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해 나가겠습니다.”

서 사장은 현재 수출비중은 전체 매출의 10%에 그치지만 앞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고급 정장 수요를 겨냥한 중국시장 공략은 현재 제품력으로도 충분하다고 밝혔다. 유럽시장도 마찬가지라 했다. 독일 콜스만으로의 수출은 일본과 이탈리아와의 경쟁에서도 뒤질게 없다는 큰 자신감을 안겼다. 새로운 매출 창출을 위한 레이스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사자후였다.

“올해 섬유의 길 24년차를 맞아 큰 변화를 맞는 것 같아요. 자직체제 구축에 나선 데다 신원 보끄레머천다이징 등 브랜드가 찾아와 직거래를 요구합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확대는 결코 아니에요. 협력업체와 서로 조율하는 것이죠. 함께 산다는 상생의 묘가 우선 아닙니까? PID, PIS 참가를 통해 상품력의 진가를 확인한 것도 큰 수확으로 봅니다. 모두 안감의 메카를 향한 디딤돌이 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