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섬유신문 34년 역사와 함께한 故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故人 “한국 섬유산업 발전 위해 신문 창간해 달라”
본지 김시중 회장, 업계 요청 받아들여 1981년 한국섬유신문 창간
故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은 국내 1호 섬유 전문 언론인 한국섬유신문 창간(1981. 7.22)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지 김시중 회장은 당시 일간지 섬유산업 담당 기자로 업계를 출입했는데 이 때 故 이 명예회장과 박용학 대농그룹 회장 등은 “국내 섬유산업 발전을 위해 관련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에 본지 김시중 회장은 국내 최초의 섬유 전문 신문인 한국섬유신문 창간을 결심하고 언론 통폐합 시절 끈질긴 정부 설득으로 1981년 7월22일 제1호를 발행했다. 이후 故 이동찬 명예회장과 본지는 지속적인 인연을 쌓으며 우호적인 협력관계 속에 섬유산업 발전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 “부(富)를 가졌다고 오만하지 말고 빈(貧)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창간 후 약 3개월이 지난 시점인 본지 1981년 10월 7일자는 ‘나의 경영철학’이라는 타이틀로 고인의 성장과정에서 사업을 시작한 동기, 인생관, 경영관 등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그는 “우리 집안은 원래 500석은 하던 독농가였는데 아버님 나이 열여섯에 부친께서 세상을 뜨시자, 가세가 기울고 아버님은 신천지를 찾아 현해탄을 건넜다”고 밝혔다. 그는 이때를 “무더운 한여름 달구지를 끌고 가노라면 어린 가슴은 땀과 눈물로 메어졌다”고 회고했다.
그가 사업을 하게된 데는 “나라를 위해 봉사를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애국애족하는 상지상(上之上)의 사업”이라는 부친의 뜻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를 계기로 정계에 진출하려던 그는 정치인의 뜻을 접고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평소 근검절약했던 故人은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분수에 맞는 이상을 세워 그 이상의 달성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이룩하면서 맛보는 희열이 곧 행복”이라고 했다. “재물은 소유보다 활용하는데 그 의의를 찾아야하며 부(富)를 가졌다고 너무 오만하면 안되고 빈(貧)하다고 해서 비굴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 살았다.
■ 그룹 총수임에도 평소 소박했던 섬유업계 대표 인물
한국 체육사의 새로운 장을 연 그의 마라톤 사랑은 ‘마라톤 경영’이라는 그만의 특별한 경영관에서 비롯됐다. 그는 1985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국 남녀고교 구간마라톤 대회’를 주최하고 이는 1992년 황영조 선수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제패라는 성과를 낳았다.
故 이 명예회장은 “산업인의 사명에 투철하고 능률과 창의로써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는 보람찬 일터를 만들며 인간 생활의 풍요와 인류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철학을 지켰다. 그는 “우리나라는 사농공상 중 공분야가 가장 뒤져 있는데 기술 중에서도 특히 과학분야의 기술개발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또 “30억 달러에 이르는 일본과의 무역불균형은 기계 시설과 원자재를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는데서 온다”며 “스포츠 경기에서 일본을 이기겠다고 기를 쓰는 것처럼 기술분야에서도 일본을 추월하려고 애를 쓴다면 우리의 앞날은 밝다”고 설파했다. 30여년 전의 위기 극복 방법은 2014년 현재의 이야기로 풀어도 부족함이 없는 선견지명으로 다가온다.
본지 1983년 6월29일자는 故 이동찬 명예회장에 대해 “이 땅에 합섬산업을 일으켜 섬유의 혁명시대를 주도해 왔다”며 “무역과 건설, 석유화학, 관광운수분야까지 16개 계열사를 거느린 총수임에도 언제나 정통 섬유기업인임을 망각하지 않는 소박한 섬유업계의 상징적인 인사”로 평가했다. 같은해 6월22일 한국섬유산업연합회 제2대 회장에 취임한 직후였다.
■“만들면 팔리던 시대 지나갔다. 과거 틀 벗고 혁신 나서야”
그는 취임 직후 본지와 인터뷰에서 “국내 섬유업계는 너무 양적 팽창에 치우친 나머지 기술 개발을 포함한 질적향상에는 소홀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며 “실질적인 기술 및 품질향상을 통해 고급화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우리나라 전 인구의 15%인 600만명이 직간접적으로 섬유산업에 관여하고 있고 이웃 일본만 해도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1000만명이 관계를 맺고 있다. 정부와 업계가 얼마나 능동적이고 효율적인 성숙산업으로 연결시키느냐가 우리 섬유산업을 성장산업으로 만드는데 성패를 가늠한다”고 덧붙였다.
1984년 7월 18일자의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 박용학 대농 회장, 김만중 삼도물산 회장이 참석한 좌담회에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섬유산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며 종전에는 감각이 둔했던 패션 등 다운스트림 분야가 모든 면에 걸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만들면 팔리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따라서 과거의 고식적인 사고방식과 어떤 툴에 안주하겠다는 생각을 갖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왔다.” 그의 말은 정확히 30년 후인 2014년 현재, 세계적인 불황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한국 섬유산업계에 던지는 화두로서 부족함이 없다.
“소탈하고 인자해 기자들에 인기”
본지 김시중 발행인 겸 회장<사진>이 故 이동찬 명예회장을 첫 대면한 때는 1976년이다. 김 회장은 “당시 국내 5대 섬유대기업은 삼성, 효성, 대우, 선경 그리고 코오롱이었다”며 “섬유산업 출입기자로서 이들 5대 그룹의 총수를 가끔 만났는데 그 중 특별히 기억나는 분이 바로 故 이동찬 명예회장”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그룹사 총수들은 좀 독선적 기질이 있는데 이 명예회장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상당히 소탈하고 인자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만났다. 특히 기자들을 살갑게 대하고 격의 없이 담소를 나눠 인기가 좋았다.”
이런 인연은 본지 창간에도 큰 도움이 됐다. 서슬퍼런 군부정권시절 언론통폐합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본지는 당해년도 신문 판권을 허가받은 유일한 매체였다. 이때 故 이동찬 회장을 비롯, 업계를 대표하는 섬유대기업들은 정부에 한국섬유신문 창간의 당위성을 담은 의견서 제출에 협조해 결국 7월22일 제1호를 발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