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t] ■ 패션그룹형지 최병오 회장 - “남과 다른 방식으로 반의 반발자국만 앞서간다”

2016-04-10     정기창 기자

패션그룹형지의 ‘크로커다일 레이디’는 기존의 관행을 깬 파격적 발상으로 이제는 국민옷으로 불릴만큼 성장했다. 소비성향이 높은 젊은 여성(미스)보다는 비교적 경륜이 깊은 미시층을 겨냥했고 유통도 지방을 먼저 공략하며 인지도를 높인 후 도시로 나왔다. 지금이야 마케팅 교과서로 불릴만하지만 당시에는 리스크가 커 쉽게 결정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최병오 회장이 평소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역발상을 강조하는 이유다. 물론 생각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남보다 반의 반 발자국이라도 더 가고자 하는 강인한 정신력이 수반되야 한다. 그는 이를 ‘투혼’이라고 부른다. 그가 지난 7일 경기섬유CEO조찬포럼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기업가 정신’에 대해 강연했다.

이날 본지 발행인도 일찌기 참석해 그의 ‘열강’을 격찬하며 큰 관심을 표했다. 최병오 회장은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살던 곳은 부산 사하지구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내리 8선을 했던 바로 그 동네다. 그의 선친은 당시 횟가루 공장을 운영하며 동장협의회장까지 지낸 지역 유지였다. 가난으로 먹고 살기 위해 무허가가 판을 치던 시대에 번듯한 허가증을 가진 공장을 운영했으니 최 회장의 유년 시절은 꽤 유복했음에 틀림없다.

“당시에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큰 가게 하나만 있어도 잘살던 때 우리집은 허가증을 갖고 공장까지 했으니까 괜찮은 부잣집 아들이었던 셈이다. 그때 우리집이 동네에서 3번째로 부자였다.”

그러던 아버지는 그가 중학교 1학년, 당시 나이 44세에 세상을 등졌다. ‘최배짱’으로 불리며 동네에서 손꼽히던 부잣집 가장이었던 아버지의 부재는 온 집안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됐다. 공부에 흥미를 잃은 최 회장은 생계전선에 뛰어들어 1970년대 대부분을 부산 국제시장에 있던 외삼촌 페인트 가게에서 보냈다.

“막내 외삼촌께서 ‘몸이 좋 안좋으니 조카가 가게를 좀 봐 달라’고 해서 7개월간 점원 생활을 했다. 앓던 외삼촌은 33세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직접 가게를 인수해 운영하게 됐다. 내 나이 19살, 처음 사업에 눈을 뜨게 된 운명 같은 일이었다.”

외삼촌 페인트 가게 일이 사업에 눈을 뜬 계기였다면 역발상으로 본격적인 기업가 길에 들어선 계기는 손위 동서가 제안한 제과점 사업이었다.

“35년 전, 500원짜리 빵이 많았는데 이게 잘 안남는 장사다보니 사람들이 별로 신경을 안쓰더라. 이 빵은 따뜻할 때 참 맛있는데…. 매일 오전 8시, 오후 1시와 5시 이렇게 3번씩 구워 내놨다. 500원짜리 빵을 사러 왔다가 손님들이 앙꼬빵도 사고 소보루도 사고 장사가 정말 잘됐다. 아울러 길에서 팔던 센베과자(전병)도 제과점에서 함께 팔았다. 길에서 근으로 사먹던 과자를 연유와 정량버터를 사용해 제과점에서 제대로 만들어 파니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새벽 6시부터 밤 11시 30분, 통금 사이렌이 울릴때까지 정말 죽도록 일했다고 했다. 손위 동서 제안과 도움으로 시작한 제과점은 소위 ‘대박’이었다. 여기서 쌓은 신뢰는 현재 매출 1조원대의 패션그룹형지를 만드는 모태가 됐다.

부족하고 못배운 대신 빨리 더 많이 움직였다
투혼·역발상은 평생 나를 이끈 성공 키워드
“페인트 가게서 사업 눈 뜨고
제과점 운영 통해 기업가로
고객 찾아 전국 누비며 옷 장사”

1982년의 일이다. 제과점 2년 장사를 잘 하고 딴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동대문 시장에서 원단집을 하던 이 손위 동서가 “그럼 (의류)제품 한번 팔아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바로 광장시장내 바다상가에 1평(3.3㎡)짜리 가게를 얻었다.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시절이었다. 산업근대화를 거친 대한민국은 이제 바야흐로 돈이 돌고 먹을 것에서 입을 것으로 소비 흐름이 기울던 때다. 그러나 옷장사는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열심히 하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제품이 좋아도 장사가 안됐다. 나중에 알았는데 옷장사가 잘 되려면 3년이 걸린다. 아무리해도 안되서 옷을 어깨에 메고 팔러 다녔다. 천호, 잠실 의류공판장뿐만 아니라 부산 국제시장도 돌았다. 3년이 지나니 자리가 잡혔다. 조그만 차이가 인생을 바꾼거다. 그때 가만히 있었으면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데도 물러설데가 없으니 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고객을 찾아 다녔다.”

집을 2채나 장만하고 기사 딸린 자가용도 타고 다니며 성공한 장사꾼이었던 최 회장은 어음이 족쇄가 돼 1993년 11월 13일 부도를 맞게 된다. 당시 어음은 아무나 쓸 수 있는게 아니었다. 최 회장은 은행 평잔이 1억원을 넘어 어음 발행에 문제가 없었다.

“마음이 약해서 남 부탁을 잘 들어주는데…. 내 명의 어음을 빌려준게 빌미가 돼 전재산을 날렸다. 그때 자포자기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정신 차리고 끈기 하나로 일했다.”

무서운 투혼으로 재기의 발판을 다져나갔다. 그는 힘들때마다 젊은 시절 배우던 권투도장 코치가 한 말이 떠올랐다고 한다. “야, 인마. 지금 이 순간만 참아봐.” 그는 지금도 스트레스 받으면 샌드백을 치며 그때를 생각한다고 한다. 이때 재기를 하며 지금의 ‘형지’라는 회사 이름을 짓게 됐다. “등불 형(熒)에 땅 지(地)다. 이 땅에 한 번 불같이 일어나자는 뜻이다. 부도를 맞은 후 셋방살이, 더부살이 하며 청계천 7가 지하실에 사무실 내서 일하고 나중에는 그 건물 최고 높은 층에 사무실도 새로 열었다.”

상표등록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때 그는 이미 ‘크라운’이라는 브랜드를 썼다. 품질보증(Q마크)를 달 수 없어 대신 품질보증이라는 글자와 브랜드 로고를 인쇄해 붙였다. “내 제품 품질은 내가 보증한다”는 뜻이었다. 30년전부터 브랜드 가치와 고객 신뢰의 중요성에 대해 일찌감치 눈을 뜬 것이다.

패션그룹형지는 ‘크로커다일 레이디’를 필두로 얼마전 30주년을 맞은 ‘샤트렌’과 ‘예작’ ‘에리트’ 등 패션브랜드기업에서 양산물류정보센터, 부산 바우하우스, 형지 부산타운 같은 유통시스템까지 갖춘 가진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도약했다. 증시 상장 회사도 2개나 된다. 이번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대통령 해외 순방길에 11차례나 참여해 지구 3바퀴를 돌았다.

지금 그의 관심은 ‘명품 인생’이다. 제일 값싼 이코노믹만 타다가 이제는 비즈니스석도 앉고, 쓸 때 쓴다는 얘기다. 골프는 55세, 매출 5000억 넘기까지는 안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골프는 안친다. 여기에는 겸손한 삶을 산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우리 회사 3~4년전에 부도난다고들 했다. 그걸 겸허히 수용했다. 낮은 자세로 임하고 겸손해야지 조금만 방심하고 자만하면 나락에 떨어진다.”

그는 지금도 남들이 비즈니스가 어떠냐고 물으면 “살얼음을 걷는다”고 대답한다. 자만을 경계하고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다.

“평생 남보다 반의 반발자국만 더 앞서 나가자는게 좌우명이다. 항상 부족했고 못배웠으니까 남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더 많이 움직이려고 한다. 젊었을 때는 부지런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생각은 창의적으로, 일은 근면하게 해야 한다. 기존 방식으로는 남을 못 이긴다. 창의도 습관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