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弔詞]故김종석님
2006-04-21 한국섬유신문
故김종석님은 청바지 독립운동가 였습니다
잠뱅이 창업주 김종석 씨가 고인이 됐습니다.
사실 김종석씨(향년 54세)는 좀 별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리바이스, 게스, 캘빈 클라인 등 외제 청바지가 판을 치는 시장에서 그것도 한글 상표로 승부를 하겠다며 ‘잠뱅이’ 이름을 내세웠습니다.
잠뱅이는 “어느 여름, 등물을 해야겠다며 등거리와 잠뱅이를 내오라시던 아버지의 말씀 중에서 잠뱅이가 뭔지를 잘 몰라 군밤을 맞았다던 기억에서 따왔다”는 것이 배경입니다.
미국 청바지 문화 속에서 우리에게 맞는 청바지를 만들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청바지에 잠뱅이 상표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반대도 많았습니다. 당시 상표가 촌스럽고 유치하다는 소리도 많았습니다.
아예 상표를 떼어 달라는 젊은이들도 있었습니다. 한국 브랜드가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고집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청바지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는데 그 큰 시장을 외국 브랜드에 장악당하고 있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김종석씨는 우리브랜드를 내겠다는 의지를 8년 동안 키우면서, 93년 잠뱅이 브랜드로 매장을 오픈했습니다. 런칭 첫 해인 93년과 그 다음 해는 그에게 커다란 시련기였습니다.
한결같이 한글로 된 상표 때문이라는 지적을 했습니다. 그래도 제품만 좋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고, 2년 후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95년 초 15개였던 매장이 그 해 말에는 30개로 늘어났고 그 다음해에는 60개, 그리고 90개의 매장을 여는 등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는 남보다 앞서 청바지 가격의 거품빼기를 시도했습니다. 청바지 하나가 10만원을 넘나든다는 것은 너무 비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품질로 승부를 걸겠다는 장사꾼답지 않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객관리를 추진했습니다. 책속에 들어있는 독자카드에서 힌트를 얻었으며 그것은 브랜드를 성공시키는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그는 늘 “장삿속 못지않게 고집도 부릴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장사꾼”이라며 말했습니다.
그가 청바지와 함께 한 지난 20여 년을 그래왔듯이 고인이 됐어도 잠뱅이가 우리나라 젊은이를 위해 제품과 서비스에서 외산에 뒤지지 않는 브랜드로 키워 나갈 것임을 믿을 것입니다. 묵묵히 한길을 걸으며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간 김종석씨 영전에 간절한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