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최경자 여사]
최경자 여사
그리운 국제양장사 시절 <1>
6.25후 잿더미로 변한 명동서 시작
박단마·김백초氏 등 연예인들 단골
서수연씨 등과 함께 ‘대한복식연우회’ 발족
다시 태어나도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하겠다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자고 일어나면 변하고 자고 일어나면 뒤바뀌는 트렌드 춘추전국시대에 패션이라는 이름과 자긍심으로 이산업의 혈통을 면면이 이어온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는 진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이 천대받던 시절. 모든 여성의 경제적 자립 기반 구축을 위해 맨먼저 패션 교육 사업을 일으켰던 사람. 디자이너가 ‘쟁이’ 취급 받던 시절, 남보다 한발 앞선 감각으로 시대를 이끌어 온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오늘날 한국 패션의 위상이 당당히 섰다.
앞만보고 달려온 시간들.
庭前半樹 衝天心 嚴下細川 達海意 (마당앞에선 조그만 나무는 하늘을 찌르는 것이 꿈이요, 바위틈의 샘은 바다로 이르는 것이 뜻이다)를 믿고 외길을 걸어온 국내 패션 선각자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는 사람처럼 죽은 듯 했던 거리가 재건의 의욕을 꿈틀대던 50년대 중반.
아직 허허벌판과 다름없는 명동거리에 옷집이라고는 송옥 양장점과 한 양장점 단 두점이 눈에 띄었다.
그나마 송옥은 건물만 지어놓은채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그 건너편에 한 양장점만이 당시 고위층 부인들을 주고객으로 꽤 성업중이였다.
피난살이의 온갖 애환이 얽힌 3년간의 대구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새 점포를 꾸미고 가게 문을 연것은 1954년도 다 저물어 가던 12월.
최경자 여사는 양장점과 학원을 겸할 수 있는 마땅한 건물을 찾던중 명동 2가 한가운데 새로 지은 2층건물을 빌리는데 성공했다.
피난지인 대구에서 당장 급한 생계 해결을 위해 재봉소나 다름없는 초라한 가게를 열때 “뜻만은 세계를 향해서 크게 넓게 가지라”며 남편은 ‘국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편이 지어준 그 ‘국제 양장사’란 이름을 그대로 쓰기로 하고 그옆에 ‘최경자 양재연구소’란 긴 나무 간판을 하나 더 달았다.
해가 바뀌면서 거리는 하루가 다르게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고 양장점도 한집 두집 늘어나기 시작했다.
고객이 점차 늘고 연예인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국제 양장사라는 당시 유명 배우나 가수같은 연예인들의 단골집이 되었다.
박단마, 김시스터즈, 윤인자, 나애심 안나영 김백초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기 스타들이 드나들며 단골이 되기 시작했다.
가게가 번창하고 자리가 잡혀가는만큼, 최경자 여사는 뭔가 보람있는 일을 찾고 싶어졌다.
그러나 손님들이 주문하는 옷을 만들어 내는 일 이상으로 그가 애착을 느끼는 양재학원 개설은 여러 가지 여건상 아직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무렵 그의 가게 건너편에 아리사 양장점이 생겨 서수연씨와 교분을 트고 서로 오가며 지내게 되었는데 복식 관계일을 하는 이들끼리 모임을 갖자는 뜻까지 같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상 디자이너들의 모임인 대한 복식 연우회(지금의 대한패션디자이너협회)가 1955S년 6월 발족을 보게되고 초대회장으로 최경자씨, 부회장에 서수연씨가 맡게 되었다.
68년에는 한국 패션전문지 의상을 창간. 세계 최신 정보를 국내에 소개했으며,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