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최경자 여사)
나의 사랑·나의 패션 80년
최경자 여사
잘나가던 국제복장사 과감 처분후 개원
1회 졸업생으로 앙드레김 등 15명 배출
스타일학과 개설…김종하 화백이 지도
국제복장학원 설립
연우회 회원들과의 일본 양장계 시찰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학원 재설립을 위한 준비에 몰두하여 이리저리 알아보자 한참 성업중인 양장점을 포기하면서까지 구태여 학원을 차리려는 나에게 정색을 하고 말리거나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조언해 주는 친지들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국제 양장점이 자신의 단골집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멋쟁이로서
그러나 우리 복장계가 바로 되고 발전하면 기초학력과 전문지식을 고루 갖춘 고급 인력을 길러내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는 나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환도해서 6년동안 운영해온 국제 양장사를 60년대말 루크양장점 주인 서정순씨에게 넘기고 학원 개설을 서둘렀다.
계성여고앞 전 조폐공사자리에 국제 복장 학원의 문을 연것은 61년 3월.
세 번째 여는 학원이지만 현판식에서 간판을 걸던 때의 벅찬 감격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모집 대상자를 굳이 대학 졸업및 고교 졸업 이상으로 못박았던 것은 학식과 실력을 고루 갖춘 인재들을 배출해 내는 것만이 디자이너들에게 대한 사회의 인식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으로 그때의 이러한 내 생각이 정령 옳았다는 것이였다는데 지금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또하나 국제 복장학원의 자랑거리라면 한국 최초로 스타일화과가 개설됐다는 점이다.
요즘은 각 대학의 의상학과나 다른 양재학원에서도 모두 스타일화를 기본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60년대 초까지의 우리나라 양재교육이라면 옷감을 말라서 바느질하는 법 외에는 색채학정도가 고작이였다.
물론 내가 공부하던 무렵에는 일본에도 스타일화 과목은 없었지만, 60년도 해외여행에서 선진국의 복식계를 살펴보는 동안 복장교육의 한 과정으로서 스타일화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훌륭한 집을 지으려면 제일 먼저 완전한 설계도가 필요하듯 의상에서도 재단과 재봉이전에 스타일화라는 설계 단계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로 스타일화를 맡아 지도하신 분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서양화가 김종하 화백이였다.
김화백은 의상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은 분으로 나의 청을 혼쾌히 받아들여 스타일화과를 맡아주셨는데 우리 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하신지 얼마 후 부터 이대 가정학과등 각 대학에도 스타일화 강의를 맡아 출강하는 등 의상 디자인 교육에 큰 공헌을 했다.
제 1회 졸업생은 15명으로 그들의 대부분은 지금 한국패션계를 이끌어 온 사람들로 이용열, 문경희, 박정일, 김부미, 최현숙, 강귀희, 최보령, 이수지, 조세핀 조, 그리고 지금은 패션계의 거목이 된 앙드레김이 있다.
앙드레김은 내가 양장점을 하고 있을때 자원해서 나를 크게 도와준 청년으로 양재를 전문으로 공부하진 않았지만, 의상에 대한 센스가 넘치고 매너가 상냥해서 많은 고객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양장점 문을 닫을때 앞일을 의논해온 김씨에게 복장학원 진학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으며, 앙드레김은 그 성공의 기반을 다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