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남기고 싶은 이야기들[국제패션진흥원 최경자 여사]

2007-11-15     한국섬유신문

나의 사랑·나의 패션 80년
국제패션진흥원 최경자 여사

전국 디자인 콘테스트 스타트
첨단 유행 확산·디자이너 권위 향상 보람
의상학·생활미술 전공자 증가 불러
무명 신인 발굴에 역점 지원자 갈수록 증가

64년. 미국의 루디 건라이크가 소매없는 톱스를 내놓고 화제를 모으는 가운데, 프랑스의 앙드레 크레지가 판탈롱, 65년 역시 크레이지가 미니를 속속 발표해 세계적인 패션의 중심 연령이 중년층에서 젊은층으로 옮아갔음을 반증했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돈많은 중년부인들만을 위한 ‘자루옷(?)’에서 탈피하여, 한마디로 주니어에서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연령의 구애없이 신선하고 활기에 넘친 옷차림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당시 유행이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만큼 다양하고 개성적이여서 패션이라

는 의미에서는 오히려 더 멋지고 귀족적이였다고 생각이 든다.
패션의 한줄기 공통적 흐름은 소프트 피팅. 전체적인 선이 부드럽게 몸전체를 스쳐 지나가면서 몸에 달라 붙지 않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편안한 무드의 옷으로서 이는 여자다운 우아함과 더불어 젊고 귀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주니어 룩이니 영패션이니 하고 패션에서 젊음이 강조되는 세계적 경향을 반영이라도 하듯 60년대 중반에는 우리나라에도 참신한 젊은 디자이너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모델리스트 자격을 취득하고 돌아온 이승복씨를 비롯, 김복환, 도재은, 윤정옥, 박윤정씨등과 국제 복장학원 졸업생중 앙드레김, 조세핀조등이 패션쇼와 신문잡지의 패션란을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인것도 60년대 중반부터다.
디자이너란 말조차 생소한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양장 전문의 순수 디자이너를 열손가락으로도 채 꼽기가 어렵던 시절에서 장족의 발전을 한셈이였다.
게다가 디자이너란 직업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양복쟁이란 말속에 숨어있던 천시경향이 사라진 대신 멋진 직업, 첨단을 가는 사람이란 동경 비슷한 분위기까지 차차 싹트기 시작했다.


각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디자이너를 새로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유망직업으로 이색직업란 같은데서 활발히 다루기 시작하고 국제 복장 학원에 오는 학생들도 4년제 이류대학에서 의상학이나 생활미술을 전공한 이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것도 내인생의 보람이고 패션계의 발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고무적인 현상이 기쁘게 나타난 것으로 50년대에 대한 복식 연우회를 창설했고 60년대에는 대한복식디자이너 협회 임원으로 함께 일해 온 몇몇 원로 디자이너들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디자이너협회는 이런 고무적인 현상을 한층 북돋기 위해 무명 신인들을 발굴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자는 의견이 모여졌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1965년도부터 열린 전국 디자인 콘테스트였다.
당시 디자이너 지망생들의 유일한 등용문이 된 이 디자인 콘테스트에는 매년 2백명 이상씩 응모자가 몰렸는데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남성 지망생들이 늘어가는 추세가 두드러져서 나를 기쁘게 했다.
콘테스트의 심사위원으로는 김원화백등 미술대학 교수 의상학과 교수 몇분 디자이너협회 임원들인 현역 디자이너들이 참가했다.


응모작은 우선 제출된 스타일화를 가지고 예선을 실시, 1백점 정도 추려서 의상을 제작해오면 이것을 다시 심사해서 50~60점을 뽑아 본선대회를 가졌다. 본선날은 무명 디자이너들의 응모작품을 일급 모델들이 입고 나와 여느 패션쇼를 방불케 했는데 개중에는 신인의 작품이라기엔 센스나 창의성이 아주 뛰어난 수작들이 상당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