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남기고 싶은 이야기들(국제패션진흥원 최경자 여사)
나의 사랑·나의 패션 80년
국제패션진흥원 최경자 여사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 발족
61년 대한복식연우회·한국디자이너협회 통합
첫사업으로 전국규모 복장연구발표회 개최
국내 직물소재 사용한 실용복 첫선 ‘갈채’
지금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대한패션디자이너협회(회장 안윤정)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당
국의 유사단체 통합정책으로 내가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복식연우회와 또 다른 디자이너 모임인 한국디자이너협회가 하나로 합쳐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를 발족했다.
통합총회는 61년 8월 27일 하우3시 국제복장학원 강당에서 열렸는데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관계로 통합에 상당한 난관이 예상됐지만 사전에 양측 준비위원들끼리 여러차례 만나서 의견을 나눈 덕분에 막상 총회 일에는 아무런 잡음이나 이견없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50여명의 양측 회원이 모인 가운데 새로운 모임 명칭의 결정과 15명의 이사진 선임이 총회의 주요 안건이였는데 새로운 모임의 명칭은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로 결정했다.
당시 선정된 15명의 초대 이사진은 다음과 같다 (괄호안은 당시 직함)
▲이사장 최경자(국제복장학원장)▲전무 오예종(아담 양장점)▲상무겸 홍보담당 서수연(아라사 양장점) ▲총무 윤진복(국제 복장학원강사) ▲재무 김경애(경기 양재학원장 ▲사업 섭외 견덕균(한국 민예사 ▲조직 박순기(서라벌 양재학원장) ▲교육 권갑순(서울 편물 학원장 ▲양재 분과 위원장(한희도(보오그 양장점) ▲감사 김순희(제일 편물점) ▲평이사 최금린(라모도 양장점) 박광현 (조타양장점) 강말원(디자이너) 손경자(디자이너) 김미중(뉴스타일 양재학원장)
이렇게 해서 발족을 본 대한 복식 디자이너협회는 그 첫사업으로서 전국적인 규모의 복장 연구발표회를 기획했다.
우리 복식 업계의 발전이나 디자이너의 자질 향상을 위해서는 새로운 인재 발굴이 절실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까닭이였다.
그래서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발표회 출품작을 모집하고 각 학교에도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해서 마감일에는 1백 30개점이 넘는 응모작을 접수할 수 있었다.
멀리 부산 대구 광주등 전국 각곳에서 온 응모작들은 협회 회원들이 모여 심사한 결과 입선된 의상은 모두 66개점.
하나하나가 만든 이의 정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견실하고 호감가는 디자인이였다.
입선자중에는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현역 교사도 몇분 있었고 대학생으로는 숙명여대 의류학과 학생들이 대거 참여해서 이채를 띠었다.
입선작 발표회는 62년 4월 21일 국민 회당에서 열었는데, 1~3층을 꽉메운 1천 2백여 관중앞에서 강영숙 아나운서 사회로 해병대 밴드 연주까지 곁들이는 등 대대적인 행사가 되었다.
그러나 외적으로 큰 규모와는 대조적으로 발표회 자체의 분위기는 신생활복 붐에 꼭 어울리게 수수하고 견실한 것이여서 관중들은 물론 메스컴의 보도도 아주 호의적인 것이였다.
이날 발표회에 쓰인 옷감들은 모두 우리 직물업계에서 내놓은 순 국산 복지들이였기 때문에 1천 8백환짜리 포플린 원피스에서 시작하여 제일 비싼 옷이 1만 8천환짜리 앙상블이였으니 다른 의상 발표회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이렇게 제한된 소재를 써서 만든 신인들의 작품이였는데도 기성 디자이너 못잖게 뛰어난 테크닉이나 참신한 디자인 감각이 엿보이는 수작들이 많았다.
특히 모시로 만든 원피스나 삼베로 만든 농촌 남녀의 노동복등은 관중들의 많은 관심과 갈채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