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Interview] 모라도 오무열 사장

2008-09-08     한국섬유신문

40년 외길고집 “옛 영광 되찾겠다!”
진보적 변화 추구…강한 기업 만들어갈 터

“모라도의 옛 영광을 되찾겠다” 오무열 모라도 사장이 모처럼 묵직한 각오를 내 비쳤다.

모라도(대표 오무열)의 역사는 40년이다. 오로지 곁눈질 하지 않고 무려 40년간을 외길을 고집해 온 모라도. 길지 않은 한국의 패션역사와 함께 2세 경영으로 이어져 내실안정을 유지하는 기업은 겨우 몇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창업자인 오상명 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2세인 오무열사장은 ‘내실있고 강한기업, 변혁보다는 진보적 변화를 추구하는 기업’으로 모라도를 이끌고있다. 특히 올해 40주년을 맞아 조직을 재정비하고 대외적인 이미지 알리기에 주력하면서 ‘거듭나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편집자 주)


-40주년을 맞은데 대한 감회가 크겠지만 장단점도 있을 것이다. 최근 리프레쉬에 대한 전략은 어떻게 구사하고 있는지?
“롱런하는 기업의 장점은 고객의 강한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브랜드가 고정고객과 함께 나이들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브랜드가 노후화된 듯한 이미지를 탈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문제는 ‘고정고객을 지켜가면서 신규창출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난제를 풀어가는 데 있다.
그래서 탄생시킨 것이 세컨라인이자 브랜드로서 ‘엠·모라도(M.모라도)’이다. 기존 ‘모라도’ 라인을 크게 변화시키면 오랫동안 지켜봐 주신 고정고객을 잃는 것 아닌가? 엠·모라도는 30대를 겨냥해 젊은 실루엣과 컬러, 디테일등을 살려주고 있다. 처음에는 전체 매장에서 15%의 비중을 두어 선보여 왔다.

그런데 의외로 매출비중은 22%를 차지했다. 당초 이런제품이 먹힐 까?라고 우려했던 샵마스터 조차도 자신들이 입을 수 있는 라인이 생기니까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고객에게 설득력이 생겼고 이제는 고정고객인 어머니와 신규고객인 딸과 며느리가 한 매장에서 쇼핑할 수 있게 된것이다. 이제 전국매장에 ‘엠·모라도’의 비중을 늘려 생산포지션을 25% 까지 끌고 갈 생각이다. 최근 단독 1호점을 대구백화점에 냈다. 의외로 호응이 높으면서 매출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내년에는 5개~8개까지 확산할 예정이다.
이처럼 ‘변혁’이라는 무리수 보다 ‘변화’에 초점을 두어 ‘고정’과 ‘신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중점을 준다.“


-브랜드 리프레쉬 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전반적 인프라 구축및 현황은?
“모라도는 오랫동안 안정영업을 해왔다. 창업자이신 회장님은 의지가 굳고 모든 구성원들을 끌어안는 포용력이 강한 분이셨다. 그러다 보니 중추적 역할을 해 온 분들이 안일한 생각과 고정관념이 깊었다.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까?하는 큰 고민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방식으로 전문인력 교체를 시작했다. 이런점이 창업자와 내가 다른점이다. 여성복업계에서 베테랑인 전재경 상무를 영입한지 이제 1년이 되었다. 전재경 상무영입이후 영업부를 강화하고 이명주 실장을 중심으로 디자인실을 재구성했다. 또 영업활성화와 내실이익 향상을 위해 전산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요소마다의 상품흐름을 파악해 판매율을 신장시키고 효율적 재고 소진을 도왔다. 또한 니트 전문 디자인의 역량강화를 위해 이명주 실장을 중심으로 패션성을 강화하는데 매진했다.

즉 아날로그식에서 첨단으로 모든 인프라가 진화한 것이다. 바코드를 도입하고 전산업무를 통해 재고관리를 하면서 효율성과 대고객서비스가 좋아졌다. 전산업무를 통한 재고관리는 판매율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왜? 우븐회사에서 만드는 니트류는 특종상품이지만 예쁘고 잘 팔리는데 모라도는 럭셔리하면서도 고품질인데 성장이 더딜까? 하고 생각했다. 이제 제대로 네임밸류를 높이고 전문브랜드로서 제 2의 도약을 하리라고 강하게 믿는다. 영업도 무조건적인 외형신장보다 이익과 효율 중심으로 마인드의 일대 전환을 이루었다. 이러한 ‘선진 기업구도’를 갖추었고 점진적인 변화를 도모해 가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모라도의 저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모라도는 대명기업으로 시작해서 일본 수출에 주력했다. 품질기준이 까다로운 일본시장을 겨냥해 당시 패션문화가 성숙되지 않은 풍토속에서도 고급의류의 대명사인 ‘니트’를 수출한 것이다. 또 73년 내수를 시작하면서도 최초로 패션쇼를 열어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72년도에 모라도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브랜드화를 시도해 오늘에 이르렀다.
고정고객분들은 나이는 들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