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기뒤기’ 한번 해봐?!

2010-02-09     한국섬유신문

김 삿갓은 브랜드네이밍의 최고봉
비아냥·멸시 빼어난 詩才로 제압

억울한 인생은 참 많다.
치사함에 부딪치고 분통이 터져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하면서 사는 것도 세상사의 단면이긴 할 터이다.
조상의 잘못 때문에 앞날이 막힌 채 평생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조선시대의 김 삿갓은 그런 점에서 대표적이라 할 만 하다.
본명 김병연(金炳淵)보다 더 유명해진 별명으로 오늘 날까지 방랑시인의 브랜드를 유지해 오고 있는 김 삿갓.
조부 김익순이 선천부사로써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인간적 처신마저 치졸하였던 탓에 천재적 재주를 恨과 해학·익살 등으로 풀며 쉰밥이나 술한잔과 바꿔야 했던 김 삿갓.
(김익순은 홍경래난때 항복하였다가 탈출한 뒤 부하의 공을 가로챈 것이 탄로나 멸문지화를 당하게 됨)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서당내조지, 방중개존물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생도제미십, 선생래불알
(서당인 줄은 진작 알았고, (그 서당내)방안의 것은 잘난 체 하는 물건 들 뿐인데, 학생은 10명도 안되면서 (작은 서당의)선생은 어찌(나 같은 대선비를)찾아 뵙지 않는 것이냐?)
주먹 잘 쓰면 싸움마당에서, 칼 잘 쓰면 칼싸움 하는 곳에서 빛이 나는 것은 당연한 법.
그래서 김 삿갓은 배고프면 어김없이 서당이나, 선비들이 모여드는 정자를 찾았다.
비아냥, 멸시를 빼어난 시재(詩才)로 제압하고 가끔은 환대도 받았지만 쉰밥이 일쑤였던 그의 일생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도는 자유인 그 자체였음직하다.


한때 벼슬에 대한 바램이 있어 장안의 양반집 자제와 친하기도 했었으나 신분 노출에 대한 두려움과 벼슬아치의 추잡하고 더러운 면면에 실망, 풍운아의 길을 택한 김 삿갓.
그의 삶은 추정적일 수밖에 없어 파격적이고 해학적, 풍자적인 면이 부각 되는 것도 그러한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그가 탁월한 현학적(玄學的)기질로 현판도 쓰고 네이밍도 했던 모양인데….
하루는 갓 쓴 선비가 많이 모인 정자에 들러보니 잔치가 한창인지라 당연한 듯 한자리 차지했다.
초라한 행색이 선비라기보다는 거지나 다름없다 보니 괄시가 대단 했을 터.
그렇거나 말거나 배를 채우고 한바탕 설전 끝에 좌중을 제압하고 보니 그 자리는<정씨 문중에서 조상공덕을 기리고 후손을 잘 되도록 비는 제를 올린 다음 현판식을 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결국 김 삿갓이 일필휘지하게 됐고 <참 잘썼다, 근사하다>는 칭송이 자자할 무렵, 노잣돈을 챙긴 다음 급히 자리를 떠났다.
귀락당(貴樂堂).
모인 선비들이 <당나귀 정>의 뜻을 해석했을 무렵 김 삿갓은 그 마을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네이밍은 프로의 세계에 속하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금전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네이밍을 할 때 산술적인면만 생각, 지나치게 아끼다 보면 돈 버리고 망하고 망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언젠가 청담동을 지나다 보니 <리파통>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돼지 보쌈 집이었는데 대로에 큼직하게 내걸린 간판을 더러 많이 들 본 모양이었다.
프랑스의 장군 이름처럼 근사하지 않느냐고 해서 거꾸로 읽어 보라고 했다.

지방도시의 뒷골목 2층에 내걸린 간판 하나. <뒤기뒤기>. 슬며시 쓴 웃음이 나왔다.
뭣하는 곳일까?
<즉석에서 우리 섹스한번 하자>는 뜻으로 통하는 뒤기뒤기. 아프리카의 서부와 북부에서 그렇게 쓰고 있었는데….
촛불만으로 분위기잡고 뜨거운 열기가 후끈했던 2층의 그 까페는 뜻 모르는 젊은 대학생들을 놀려 먹자는 심보에서 비롯 됐을 것으로 유추되지만….


브랜드는 오염되지 않는 긴 강물처럼 영원성을 띄고 흘러가야 제대로 된 것이고 생명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