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부터 2004년까지 13년간 한국패션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국내 섬유, 패션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미시건대학 대학원 공업역학과와 영국 아쉬리지 경영대학 단기과정을 수료했다. 1955년 육군소위로 임관 후 3개월만에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기계공학과 교수로 10년간 재직했으며 1965년 삼광직물 생산 및 무역 담당 상무이사로 섬유패션산업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한국소모방협회 업무부장, 국제양모사무국(IWS)한국지부 대표, 금강모방공업 대표이사 사장, 한국섬유공학회 이사, 한국의류학회 이사, 한국섬유기술연구소 이사, 한국의류시험연구원이사, 한국패션협회 회장 및 명예회장, 한국섬유산업연합회 부회장, 아시아패션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2003년 한, 중, 일 패션협회가 참여한 아시아패션연합회 창립 기틀에 앞장섰다.주요 저서로는 봉제과학
모방적, 모제품 용어사전
한, 일, 중, 영 어패럴 용어대역 핸드북
섬유패션소재 사전
한중일영 대역 섬유패션용어사전
알기쉬운 양모제품
소재를 알면 디자인이 보인다 외 다수
4년간 기고, 즐거운 행보
“지난 4년 동안 보람있고 즐겁게 보냈습니다. 항상 3~4회 분량을 미리 써 두곤 했는데, 한 번은 다리가 골절 돼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어요. 마감시간을 지키기 위해 유에스비(USB)에 담긴 원고를 송고하려 병원 휠체어를 타고 컴퓨터가 있는 층까지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막상 연재를 끝내고 나니 아쉽습니다. 4년간 즐겁게 일했습니다”
지난 4년간의 “알기쉬운 패션소재” 공석붕 칼럼 연재를 마친 공석붕 회장의 얼굴은 시원섭섭함보다는 또 다른 ‘연구’를 통한 패션역사를 ‘재조명’ 해보려는 의욕으로 빛이 났다.“알기쉬운 패션소재”는 게재 첫 호부터 신진디자이너와 섬유패션계 초년생, 학계의 교수들에 이르기까지 높은 관심의 대상이 됐다. 심지어 현업 디자이너들 조차도 “그동안 막연했던 소재의 기초상식과 특성을 다시 공부하는 기회였다”며 연재의 마무리를 서운해 한다. 이 연재물이 인기를 모았던 것은 공석붕 회장이 섬유와 패션을 아우르는 해박한 현장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양쪽의 니즈와 궁금한 사항들을 이해하고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공석붕 회장은 한국패션협회 회장직을 13년 동안 수행하면서 그 누구보다 패션의 완성과 차별화를 위해서는 ‘소재 경쟁력’을 획득해야 함을 강조해 왔다. 두 산업간 융합이야 말로 패션선진국으로 가는 바로미터임을 주창해 왔던 것이다. 누구보다 패션산업의 메카니즘에 해박하고 또한 어떤 섬유전문가보다 그 중요성에 대해 역설해 온 공석붕 회장은 1세대 멀티플레어이며 이 시대의 멘토이다.“소재 없는 패션제품은 생각할 수 없으며, 소재의 특성을 모르면 제대로 된 패션 제품이 나올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글로벌 시대에 걸 맞는 소재에 대한 기초지식을 다시 한번 챙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지론이 장장 160회분에 달하는 본지의 ‘공석붕 칼럼’을 연재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서양복식 전파 120주년, 역사수집
공석붕 회장은 “한국에 서양복식이 전해진 지 120년이 됐다”며 역사와 변천과정, 안착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재 조명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계획을 설명했다. “서양복식이 전파됐다는 것은 문화와 사고까지 함께 전달됨을 의미하는데 그 과정에서 웃지못할 에피소드 또한 많다”고 몇가지의 사례를 들었다.
서양복을 선물받은 송병국이 바지를 뒤집어 입었던 사연, 상투를 자르려 했더니 죽음을 불사하겠다던 최익현 선생, 그는 유식한 학자였고 대마도로 유배를 보냈더니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죽었다는 일화도 있다. 윤보라, 박에스더 등 한국의 신여성 등장과 옷차림에 대한 일화 등 서구문물과 함께 전해진 서양복식의 전파과정을 연구, 분석하면 한국서양복식사의 역사와 변천사가 될 것이라 자신했다. 이 같은 섬유, 패션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왕성한 활동이 60년간 몸담아 온 업계가 아직 공 회장을 열혈청년과 같이 바라보는 비결인 것 같다.파란만장한 일대기, 섬유패션계 입문까지
공석붕 회장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1955년 육군소위로 임관했으며 3개월만에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기계공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공 회장은 “6.25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4개월간 훈련도 받고 참전했는데 돌아가도 좋다고 해서 귀가했다. 사실 참전기록이 있으면 군대가 면제되는 것이었는데 당시 시국이 어수선했고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군대에 가게 됐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언급했다.
그렇게 소위로 임관한 후 섬유와는 상관없이 기계공학과 교수로 10년을 재직하게 됐다. 국비유학생으로 미시간 대학 대학원 공업역학과에 입학했지만 20개월째 되던 시기에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났다. 그러자 지원이 끊어져 돈이 오지않았고 돌아가야 하는데 여비조차 없었다. 미국정부를 통해 미군 대령과 면담을 했고 100달러를 지원받아 귀국을 하게 됐다. 그 여정에서의 돌발상황들과 에피소드를 시종일관 웃으면서 즐겁게 이야기 했다. 귀국한 후 우여곡절 끝에 65년 3월 31일에 마침내 제대를 하게 됐다. 정국이 어수선했고 경제도 어려웠던 시절, 아슬아슬하고 힘들었던 여정이었지만 공 회장은 청년시절을 떠 올리며 개구진 표정으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본 기자를 타임머신에 태우고 시간여행을 했다.
공 회장은 “기쁜 소식이 있다. 학도병 참전을 인정받아 매월 국가가 소정의 용돈을 준다”며 소년처럼 좋아했다.
삼광무역서 첫발…IWS 한국대표 역임
1965년 삼광직물 상무이사로 취업을 해 생산 및 무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섬유패션산업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됐다. 그러나 공 회장은 1년만에 삼광직물을 그만두게 된다.
“일을 배우고 열심히 했지. 그런데 6개월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부의 부정행위가 잦은 거야. 부도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참지못하는 성정이니 그만뒀지….” 이렇게 첫 사회생활은 큰 교훈을 남기고 1년만에 불발로 끝났다. 이 회사의 사장이 워낙 마당발이라 다른곳에 취업도 불가능해 동대문시장에 진출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낭인’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소모방협회 업무부장으로 입사를 한 공 회장은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하고 한국의 섬유산업에 대한 현장경험을 인정받아 국제양모사무국(IWS)이 창립되면서 한국지부대표가 됐다.IWS에서 한국지부 대표를 맡으면서 타 아시아국가의 지부와 달리 철두철미한 경영기준을 설정해 지키고 정확한 회계처리를 함으로써 장장 21년간 근무하게 된다. 이후 금강모방 사장을 하면서 한국패션협회 회장직을 맡게 됐다. 5년후 금강모방이 부도가 났지만 13년간을 한국패션협회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패션업계 발전을 위해 봉사와 헌신을 했다.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뒤에도 2003년 한, 중, 일 패션협회가 참여한 아시아패션연합회(AFF)창립의 산파역할과 글로벌 아시아 시장에서 한국의 섬유 패션산업 위상을 높이는데 헌신했다.
패션협회·AFF, 성장토대 구축
공석붕 회장은 한국 섬유패션산업의 성장 동력을 ‘소재’와 ‘인재’에서 찾고 있다. 소재의 중요성을 널리 전파하고 깨우치게 하기 위해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또한 정암장학회 장학 사업을 통해 섬유 패션 인재양성 발굴에도 헌신했다.
한국패션협회와 아시아패션연합회, 한국섬유기술사회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는 공 회장은 정헌 산업상, 산업포장 등 다수의 명예로운 상을 수상했으며 아직도 후진양성과 섬유패션산업의 발전을 위한 애정으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사고가 고루하고 게으르면 늙는 것”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섬유 패션은 노력하는 자에게는 ‘지속성장’ 가능한 산업임”을 거듭 강조했다.
/글= 이영희 기자yhlee@ayzau.com
사진=정정숙 기자jjs@ayza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