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은 좀 더 대중적 시장 지향
고가 명품 브랜드에서 큼지막한 후드티셔츠를 판매하면서 하이패션(고급패션)과 스트릿패션(일상패션) 사이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몸에 맞는 격식있는 정장을 표방하던 하이패션은 몸을 편하게 덮는 일상복 디자인을 도입하고, 스트릿패션 브랜드는 반대로 고가 정장 영역으로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3달동안 돈을 모은 우성진(가명, 26)씨는 어젯밤 11시 명품 온라인 플랫폼 매치스패션에서 90만원대 발렌시아가 후드티셔츠와 100만원대 운동화를 주문했다. 우성진씨는 “고가 브랜드라도 디자인과 가격이 부담스럽다고 느끼진 않는다”며 “100만원 정도는 돈을 모아 살 수 있고 비싼 가격만큼 퀄리티가 좋아서, 후드티나 에어팟 케이스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사기도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소비가 늘면서 경계는 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힙합과 스트릿패션에서 주로 보이는 볼캡(모자) 브랜드 앤티머리디엄은 스트릿패션 고급화를 지향한다. 앤티머리디엄 채준석 대표는 “코로나19로 소비방식이 바뀌어 온라인 브랜딩화 현상이 강화됐다”며 “소비 트렌드가 ‘스트릿패션의 하이패션화’로 정착했다고 판단하고 브랜드를 런칭했다”고 말한다.
앤티머리디엄은 브랜드 정체성에 맞게 직접 상품을 디자인하고 모든 생산과정을 국내에서 진행하고 조율한다. 채 대표는 코로나19로 오프라인 상권이 문을 닫자, 더 이상 온라인 스트릿패션 브랜드가 ‘홍대나 가로수 상권에서 유행한다’고 소비자를 설득하지 못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상패션 브랜드들은 새로운 시장 흐름에서 살아남기 위해 브랜드 특징을 갖추는 방향으로 모습을 바꾸게 됐다.
신(新)명품 브랜드가 대거 등장했고,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로 불리는 고전 명품 브랜드 위주였던 하이패션계 영역이 넓어져 경계가 옅어졌다는 관점도 있다. 에루샤 외에 컨템포러리 패션을 지향하는 메종키츠네와 메종 마르지엘라, 아미와 고가 스트릿 패션을 지향하는 발렌시아가, 오프화이트까지 대중에게 명품브랜드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신명품 브랜드들은 스트릿패션 디자인을 차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분석이다.
2010년대 이후에 MZ세대가 일상에서 입는 헐렁한 오버사이즈드핏(이하 오버핏)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유행했던 힙합 패션에서 시작됐다. 당시 힙합 매니아층은 하이패션이 힙합 디자인을 일상적인 수준까지 차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2006년부터 한정판 신발과 티셔츠를 수집했던 김성현(가명, 35)씨는 “고가패션이 정장에서 벗어난 흐름은 90년대 하이패션계가 조금씩 서브컬처(하류 문화) 요소를 도입하면서 시작됐다”며 “코로나와 온라인 플랫폼으로 그 양상이 폭발적으로 확대됐다”고 말했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은 오버핏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고, 소비자 또한 하이패션계의 오버핏 디자인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한 패션 기업 대표는 “하이패션 영역이 다양해지고 온라인 소비가 평범해진만큼 역으로 스트릿브랜드들은 유통전략 차원에서 하이패션으로 브랜딩하는 건 당연한 흐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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