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 라스트와 일대일 상담으로 팬덤 구축
이서정 디자이너는 발목이 약하다. 십여 년 전 크게 다쳤고 수술 후유증이 오래 남았다. 대부분의 구두가 불편해 주로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예쁜 구두는 원래 아파”라는 말이 늘 의아했다. 어떻게 고통이 당연할 수 있을까. 세상에 아름답고 편한 구두가 아직 없다면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독특한 미감이 담긴, 오래 신어도 통증 없는 구두를. 이 디자이너의 바람은 홍익대 패션디자인학과 대학원 시절 평생의 동지를 만나 날개를 달았다.
성수동 수제화 공장이 가업인 김한준 테크니션은 신발제조공정에 대한 이해가 깊고 이서정 디자이너의 꿈을 100% 공유하는 파트너다. 두 사람은 2019년 슈즈브랜드 ‘피노아친퀘(Finoacinque)’를 런칭했다. 이탈리아어로 ‘5까지’라는 의미다.
독특한 미감과 장인정신의 만남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5㎝더라고요. 그보다 굽이 높으면 경사각 때문에 발목이 꺾이고 무게중심도 심하게 쏠리게 돼요. 그래서 브랜드 이름을 ‘피노아친퀘’로 지었어요. 예쁘고 개성 있는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편안한 착화감이야말로 우리 구두의 핵심이니까요.”
예쁘기 위해 아플 필요는 없다. 이서정 디자이너는 자신의 구두를 통해 그 당연한 사실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다. 혼자 힘으론 불가능했다. 피노아친퀘를 상징하는 미니멀한 실루엣과 산뜻한 컬러, 재치 있는 디테일이 디자이너의 몫이었다.
김한준 테크니션은 그 독특한 디자인에 내구성을 더하고 실제 착화 시 피로감이 줄도록 구체적인 설계를 담당한다. 이들의 초안을 기본으로 40~50년 경력의 성수동 수제화 장인들이 견고하고 완성도 높은 신발을 제작한다.
“가치 있는 구두를 만들고 싶었어요. 피노아친퀘 런칭 전에 니트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아울렛에 재고로 널려있는 제가 만든 옷들이 꼭 시체처럼 보였죠. 그때 결심했어요. 버려지지 않고 오래 신을 수 있는 예쁘고 편한 구두를 만들자고.”
피노아친퀘는 100% 주문제작방식으로 한없이 맞춤에 가깝다. 고유의 라스트(신발 원형틀)와 R&D 센터를 갖추고 개별 상담을 통해 고객마다 다른 특징을 최대한 반영하고자 노력한다. 온라인 브랜드지만 성수동의 오프라인 쇼룸에서 대면 상담도 가능하다.
이런 정성은 피노아친퀘의 제작을 전량 맡고 있는 30년 전통의 라플로채니 슈즈디자인 연구소의 기술력과 합쳐져 편안한 착화감으로 빛을 발한다. 젊은 디자이너의 독창성이 성수동 수제화의 역사를 만나 강렬한 시너지를 일으킨 사례다.
친환경소재·3년무료AS 등 지속가능성 추구
“제 디자인의 원천은 60년대 모즈룩이에요. 뮤즈는 트위기고요. 그 시절 패션을 오랫동안 좋아했거든요. 당시 유행하던 미니스커트의 밑단 실루엣을 본 따 피노아친퀘만의 라스트를 만들었지요.”
동글동글 사랑스러운 구두 앞코는 이서정 디자이너만의 개성이다. 토 룸이 넓은 라운드 형태로 발가락 눌림이 없고 입체패턴으로 오래 걸어도 편안하다. 아웃도어용품에 주로 사용되는 ‘스토퍼(stopper)’를 구두에 활용해 발의 붓기에 따른 통증, 헐떡거림, 피부손상 등을 방지하는 기능적 요소이자 피노아친퀘만의 디자인 포인트로 삼기도 했다.
이처럼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보단 개인의 취향과 감도를 온전히 살리는데 집중한 결과, 피노아친퀘는 런칭 4년 만에 단단한 팬덤을 가진 디자이너 슈즈 브랜드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주문제작을 통해 재고를 남기지 않고 내구성 높은 제품을 만들어 오래 착용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지속가능성을 추구해왔어요. ‘3년 무료 수선 바우처’를 제공하는 것도 같은 이유지요. 하지만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생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철학이 맞는 브랜드와 다양한 협업도 진행하고자 합니다.”
최근 이서정 디자이너가 몰두하는 주제는 ‘지속가능성’이다. 우선 이번 서울패션위크를 통해 선보인 SS컬렉션은 꾸준히 비동물성 소재를 소개해 온 비건타이거와 콜라보레이션으로 진행했다. 패션코드와 패션위크 수주회에서는 옥수수 재생 가죽으로 만든 비건 슈즈도 첫 선을 보였다.
2023년 FW컬렉션 키워드 역시 ‘지속가능성’으로 잡았다. 학과 전공인 섬유디자인 지식을 살려 최근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에코레더와 달리 진짜 친환경가죽으로 제작한 구두를 선보일 계획이다.
또 하나의 화두는 세계시장 진출이다. 작년 가을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바이어가 꾸준히 피노아친퀘 제품에 관심을 보여 왔다. 이번 서울패션위크 수주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해외 공략에 나설 계획이다. “전세계 누가 신어도 편하고 예쁜 구두를 만들고 싶어요.”
이서정 디자이너의 포부처럼, 피노아친퀘는 5㎝ 굽에 독특한 미감과 성수동 수제화 헤리티지를 담아 세계무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