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0주년 특집]한국 패션 비즈니스 2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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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열기 ‘기폭제’…고감도 소비시대 개막내셔널·디자이너브랜드 분리…롯데·현대·쁘랭땅백화
한국 패션비즈니스의 역사는 88 올림픽을 계기로 ‘신생 한국’을 전세계에 피력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암살, 쿠데타등의 힘으로 의한 정권 쟁탈전에서 국민 투표에 의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고 새로움을 향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80년대. 당시 민주화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문민사상의 자유화는 물론, 정치 경제 그리고 국민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패션계에서의 가장 큰 사건은 지금까지 제한되어 왔던 사람들에게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 전격적인 이런 국내 정책의 변화는 여건에 제한이 많았던 특히 20대 디자이너 지망생들을 억압에서 해방된 젊은 힘을 밖으로 발산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를 보고, 또한 배우면서, 국내 산업자체와 속속 연계시키는 거대한 저력을 발휘했으며, 그 정보 수집활동 역시 활발하여, 세계의 시장에서의 꿈은 물론, 한국의 패션 산업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명동과 이대입구, 그리고 동대문 남대문 패션에서 시작된 스트리트 패션의 돌풍은 유통의 대 변혁을 몰아 온 것은 물론, 당시까지 디자이너 부띠끄나 양장점 위주의 주문복체제에서 내셔날 브랜드 제휴체제로의 큰 변화를 몰고 왔다. 한국 섬유·패션업계의 대변지로서,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0년을 거쳐온 본지의 20년간 크고 작은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국 패션의 역사를 살펴본다. 디자이너 브랜드의 다각화 61년 대한복식디자이너 협회가 발족되었을 당시, 디자이너의 협회가입은 신분 확인 그자체와 다름없었다. 패션에 대한 사람들의 특권의식은 지금의 그것보다 더한 것이였으며, 패션을 대하는 자세 역시 진지하기 그지 없었다. 또한 대기업이 아닌, 디자이너의 신분으로, 외국에 가기 위해서는 복식 디자이너 협회의 협회의 신용보증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당시 문광부 산하 제일 패션 단체로 올라있는 이 협회의 파워는 막강 그자체였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패션에 대한 또다른 시각의 존재로 “ 패션이란 경제와 일말의 관계도 없는 사치풍조이며, ‘양장점’은 ‘양주’와 ‘양담배’, 그리고 ‘양공주’등과 함께 이사회에서 영원히 척결되어야 하는 부패의 온상으로 사회적 냉대를 받아야하는 이중의 잣대가 공존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패션은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였다. 당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쟁쟁한 디자이너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독특한 카리스마적 분위기로 장안의 멋쟁이들을 압도시켜 나갔다. 그러나 88년 해외여행 자유화는 디자이너와 소비자 모두에게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그 막강한 복식디자이너 협회도, 고급 부띠끄 라인을 고수하는 그룹과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유통망에 입점, 초기 내셔널 브랜드 영업으로 성장을 도모하는 그룹, 그리고 또다른 디자이너 그룹등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내수 고도화로 공급기반 구축 80년대후반, 한국과 미국 일본의 섬유패션업계에 마찰이 일어났다. MFA(다국간 섬유협정) 문제. 그에 따른 미국의 수입규제, 더욱이 일본 및 한국 제품의 덤핑 소동등 2개국 내지는 다국간에 걸친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한국도 정치 교섭의 소용돌이에 놓여지게 되었다. 높은 성장률을 보이며 고도로 성장해 온 한국 경제, 전 국민 수준에서의 생활수준의 향상은 국내 시장의 성장과 육성 방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수의 고도화가 병행됨과 동시에, 이나라의 패션 산업에도 착실하게 고품질 고감도 상품을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굳히게 된 것이다. 특히 패션 부띠끄가 한데 모인 명동은 일요일도 10시를 넘을때부터 어디에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젊은 열기에 압도될만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마켓이였다. 롯데, 신세계, 미도파, 현대, 제일의 각 백화점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롯데 쇼핑 센터등 대형점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설립되었으며, 그거리에는 패션 부띠끄 음식점과 액서사리 업체들이 줄이어 있었다. 명동은 이른바 패션의 아이쇼핑을 겸한 시민들의 즐거운 위크엔드의 상징이였던 것이다. 당시,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경기 동향을 알고 싶다면 명동에 가라고 했을 정도다. 또한, 이때는 명동에 이어, 압구정동이 고급 부띠끄와 유럽 브랜드점의 진출로 새로운 패션거리로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판 맨션메이커…이대앞 특히 이화여대와 연세대학등 명문대학이 몰려 있는 대학가가 새로운 패션 타운으로 등장했다. 이대 주변에는 학생들의 하숙집과 아파트가 많았지만, 원룸을 개조한 아뜰리에와 메이커가 밀집되어 있어, 이른바 한국판 맨션메이커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전날밤에 봉제한 상품을 메인 스트리트 점포에 배달하고, 전날의 판매량을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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