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장환경이 경제 이론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조성되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디자이너인 제게 최근 유행에 대해 물어 본다면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다른 산업에 비교해 볼 때 패션산업은 모든 면에서 다변화하고 또한 소비환경 역시 좋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패션계가 시장을 예측하고 성장을 도모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로 박윤수 디자이너와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선배로서 역할과 자기성찰에 몰입
박윤수 디자이너는 “하이앤드 디자이너 브랜드는 대한민국 패션의 질적 밸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최근 국내 하이앤드 시장은 대폭 축소됐습니다. 고객들 역시 소비환경이 좋진 않은 것 같습니다.
저가시장이 확산되고 유통에선 수입 럭셔리에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무엇보다 소비자들이 ‘하이앤드 디자이너 브랜드’에 대한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라고 염려했다. 현 상황에 대해 우려에 그치지 않고 요즘은 그 고민만큼, 패션계 선배로서 기여할 수 있는 역할과 자기성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하이앤드에 대한 동경과 패션문화를 이끄는 디자이너에 대한 존경, 신비감이 언제부턴가 사라졌단 느낌이 듭니다. 패션하는 사람들이 각계각층의 모임에 참가했을 때 그 누구보다 당당한 존재감이 있었는데 요즘은 연예인처럼 보여지기도 하고 정체성이 모호해졌단 생각입니다.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것을 창출하기 이전에 우리가 놓치고 소홀했던 것부터 강화해야 겠다는 각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성을 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패션계 중견디자이너, 신진들 까지 새롭게 중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입니다.”
확고한 자기색깔 ‘정체성’ 회복
세계 경제가 저성장, 장기 침체속에 있지만 해외 럭셔리 브랜드들은 오히려 시장 양극화속에서 당당히 성장하고 있음을 볼 때 국내 하이앤드 마켓의 재도약이 어려울 것이란 속단을 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 하이앤드 마켓은 상류층보다 대중들이 동경하고 가치를 인정할 때 어느정도 규모의 경제가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자기색깔이 확고한 브랜드 정체성을 고수하고 고급화할 것은 확실하게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이앤드 시장이 어렵고 저가시장이 확대됐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저가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지 않아요. 최근 동대문 시장을 계속 나가보고 있는데 정말 심각할 정도로 한산합니다.
제 생각은 동대문 역시 색깔을 고수하고 중국의 광저우 등 도시보다는 확연하게 차별화하고 고급화해야 합니다.‘메이드 인 코리아’가 중심이 돼야 하는데 문 닫는 봉제공장이 늘어나고 있어요. 한국의 봉제공장은 현재 우리패션계가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인데 심각한 현실입니다.”
스트리트에 치중, 다양성의 부재
글로벌 감성의 스트리트 캐주얼 ‘빅팍’을 런칭하고 해외는 물론 국내서만 서울컬렉션에서 20회째 패션쇼를 열어 개성강한 의상들을 소개해 온 박윤수는 최근 본사 1층 리뉴얼 공사에 한 창이다.“아직 우려만 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자기 색깔이 강한 브랜드들은 살아남고 성장합니다.
소비자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 때문에 하이앤드 브랜드를 찾습니다. 많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하나를 위해서는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가치 충족의 문제이지요” 라며 시장 다변화속에서 진짜 필요한 것은 차별화, 고급화, 다양성 추구를 통한 전체 마켓의 발란스를 맞춰가는 것임을 강조한다.
서울컬렉션 역시 한국 하이앤드 브랜드의 밸류를 가늠하게 하는 만큼 하나의 장르에 치중하지 않고 다양성과 아이덴티티 구현에 충실해야 하며 그러한 분위기조성이 꼭 실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진들이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컬렉션을 보여주지만 막상 오더로 연결이 안되니 갈수록 디테일이나 표현력이 희석됩니다. 그러다 결국은 롱-런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며 “해외 전시도 마찬가지죠. 자기 색깔이 뚜렷한 제품을 가지고 수차례 참가하는 인내와 고집이 필요합니다.
자기 컬러나 아이덴티티가 뚜렷하지 않으니 성과도 없고 곧 포기하고 성장 할 수 없는 겁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해외전시에 참여하면 꼭 후배들의 부스에 가서 조언을 하게 된다고 한다.
고객은 좋아하는 것엔 돈을 쓴다
고객들은 많이 사는게 아니라 좋아하는데 돈을 쓴다. 예전 경제성장기에 활약한 디자이너들에게 후배들이 “그 시절이 좋지않았나?”라고 묻곤 한다며 “그 때도 지금 만큼 처음은 쉽지않았고 원단 살 돈도 없이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는 등 힘든 건 똑 같았다”고 대답한단다. 그래서 “근시안적으로 보면 안된다”는 조언을 꼭 한다.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거울이 돼야 하는데 선배들부터 확고한 자기색깔과 고집을 가져야 하고 지금부터라도 나부터 노력해야 겠다는 자성을 하고 있습니다”라며 “일본에 요지 야마모토 매장을 가면 언제나 확고한 브랜드 색깔과 차별화된 제품력에 매료됩니다. 우리나라 역시 하이앤드 브랜드라면 이러한 면면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입니다”라고 방향등을 컸다.
대한민국 패션계 자존감을 지켜 온 ‘앙드레 김’을 떠 올리곤 한다는 박윤수 디자이너는 “각계각층의 기라성 같은 인사들이 모인 외부행사에서 당당히 중앙을 차지하며 존중받았던 선배였고 우리산업의 대표성을 각인시킨 분이죠. 존재감이 있었어요. 그동안 우리는, 나는 뭘했나!하는 자성과 함께 후배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사명감의 문제들로 고민하고 있습니다”고 심금을 털어놨다.
국내기반 확고해야 해외서도!
“집안이 잘돼야 바깥일도 잘 할 수 있어요. 패션계의 이미지가 좋아야 하고 한국시장에서 성장기반이 확고해야 해외에서도 성공할 수 있어요. 지금은 근간이 흔들리고 앞뒤가 잘 못됐다는 느낌입니다. 디자이너들은 선, 후배 할 것 없이 격에 맞게 활동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존경받아야 해외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어요. 겉으론 화려해 보여도 다른산업에 비해 저평가되고 자존감이 저하되면 안됩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1,2세대 디자이너들이 백화점 매장에서 영업했지만 점차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컬렉션에서 화려하게 보여졌던 의상들이 백화점 유통이나 여타 매장에서 이미지가 다른 실버패션으로 탈바꿈하니 디자이너 자신은 물론 소비자들 역시 괴리감과 상실감에 빠진다. 백화점에서 성장했다고 하나 높은 수수료에 이익률 저하, 해외브랜드 영입 등으로 사실상 동반성장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원인으로 박윤수 디자이너 역시 탈 백화점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백화점이 앞으론 확실한 차별화를 위해 디자이너 브랜드의 사입제도를 가져갔으면 한다”는 바램도 밝혔다. “개성이 확고한 디자이너들은 제도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향후 사입제도는 필연적으로 도입될 것으로 본다”고 향방을 조명했다.
반세기 역사 (사)중앙패션디자인협회의 의미
박윤수 디자이너가 회장을 맡고 있는 사단법인 중앙패션디자인협회는 사관학교처럼 선, 후배간의 끈끈한 유대관계와 예의, 질서를 지키는 단체로 정평이 나있다. 매년 신진디자이너를 발굴해 온 중앙패션디자인컨테스트는 올해로 49회째를 준비중이고 내년이면 50회로 반세기를 맞는다.
중앙패션디자인협회는 매년 수상자들을 회원으로 흡수하고 현업에서 서로 정보공유와 격려를 통해 동반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해주고 있다. 패션디자이너로서 진정성을 갖고 활동하기를 원하는 지원자들이 매년 늘어나고 있고 문의도 이어진다.
박윤수 회장은 대한민국 패션계가 존중받을 수 있는, 디자이너가 패션계를 이끄는 아티스트로서 자존감을 세울수 있는 풍토 마련이 중요한 시점임을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