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다가 목화씨 몇 알을 붓두껍 안에 숨겨 고려로 들여왔다. 그의 장인 정천익은 3년 동안의 노력 끝에 목화 재배에 성공했다. AD 552년에는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밀명을 받은 네스토리우스 수도사 두 명이 속이 빈 대나무 지팡이에 누에고치를 숨겨 중국에서 밀반입했다. 이 누에들이 오늘날 유럽산 실크의 조상이다.
비잔틴 비단과 고려 목화 밀수의 유사성
유명한 두 스토리를 같이 들어보면 누구라도 어떤 의구심이 고개를 들게 될 것이다. 역사 이야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순한 사실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설적인 이야기로 변모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틱하고 영웅담이 풍부한 이러한 이야기는 실제 사건이더라도 이를 보존하고 재전승하는 과정에서 부풀려진 것들이 많다.
비잔틴 비단 밀수 이야기와 문익점의 목화 밀수 이야기는 80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있지만 너무나 비슷하여 둘 중 하나는 패러디인 것처럼 보인다. 실크 얘기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역사적 사실로 어디나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목화는 그 진위와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의문이 제기된다. 문익점 이야기는 비잔틴의 유명한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날조된 것일까? 두 얘기의 유사성에 근거한 의혹 제기는 이것이 최초이다.
가장 권위 있는 고려시대 역사기록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이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문익점의 목화 밀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문익점 이야기가 고려사에 기록되었다면, 그의 공헌에 대한 동시대의 인식을 시사하며 더 많은 신빙성을 부여하겠지만, 그의 스토리는 조선의 ‘태조실록’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면화를 보고 씨앗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문익점은 이듬해 고향인 산청으로 돌아와 장인 정천익에게 면화 씨앗 5개를 주어 기르도록 하였다” 붓두껍이나 밀수 얘기는 전혀 없다.
이후 학자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붓두껍 이야기가 등장한다. 즉, 상세히 기록된 비잔틴 비단 이야기와 달리 문익점의 목화 이야기는 고려 시대의 1차 사료가 부족하다. 이는 이 이야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꾸몄거나 심지어 조작되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백제시대 이미 면직물 제조, 목화 밀수 필요했나?
비단과 달리 면화는 중국에서 유래하지 않았다. 면은 기원전 5000년경 인더스 계곡에서 처음 길들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도 아대륙, 중동, 이후 중국 등 다양한 지역에 이미 알려져 있고 재배되고 있었다. 고려(918~1392년) 때에는 이미 면화가 잘 알려져 있었고 백제 시대의 면직물 제조도 확인되고 있다.
“나에게 모시 뿌리를 보내준다면 그대에게 목화 열매를 보내겠소” 고려의 유명한 학자 이색의 ‘목은집’ 에 있는 내용이다. 모시로 유명했던 한산 사람이었던 이색에게 원나라 학자가 그런 제안을 했다. 당시 고려와 원나라는 개방적인 무역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목화는 무역 금지품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밀수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기는 방법은 씨앗의 크기와 이후 성공적인 작물 재배에 필요한 적정량을 감안할 때 극히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붓두껍에 숨겨둔 씨앗 몇 개로는 기후가 생소한 새로운 지역에서(고려 때에도 기후가 적합하지 않았다) 때로는 몇 해에 걸친 시험재배를 통해 본격 생산을 시작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므로 이 이야기의 진위에 강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후 면화의 대량재배가 실제로 일어났다면 몇 개의 씨앗이 아니라 몇 가마니는 필요했을 것이다.
고려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무역 관계가 활발했기 때문에 일반 무역 채널을 통해 면화 씨앗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잔틴 수도사들이 길고 위험한 왕복 2만 8000km 여정을 떠나야 했던 것과 달리, 한국의 상인과 외교관들은 가까운 중국을 자주 여행했다.
문화적 호소력 위해 추가된 영웅 서사
비잔틴 비단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널리 퍼져 광범위한 문화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다. 현대적 증거나 사료의 부족, 기술된 밀수 방법의 비현실성, 비잔틴 비단 밀수 이야기의 잠재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다른 문화권에서 잘 알려진 영웅적인 역사적 기록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하게 중요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당시 수입에 의존하던 값비싼 목화의 대량 재배에 성공하여 대중화에 기여한 인물이 문익점이라는 사실은 조선실록의 기록이 뒷받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