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 자산의 기록 필요성 대두변화 빠를수록 ‘온고지신’깨달을 때
19세기 말의 20세기 초 우리사회는 강제적인 문호개방과 밀려오는 서양문화의 충격으로 일대 퍼닉상태에 빠져들어갔다.
그후 일제의 침략과 광복, 전쟁의 혼란을 겪으면서 들어온 패션이라는 것도 우리에게는 정말 ‘사는 것’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꿈이자 허영의 대체단어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이 점차로 안정되어 가던 60년이래의 경제개발이 추진되는 동안에도 패션은 국가 경제 발전에 일말의 가치도 없는 사치의 씨앗으로 매도되어, 몇몇 진보적인 디자이너들은 스스로의 미의식과 사회적 분위기에 끊임없이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옛날과는 달라서 요즘 사람들은 패션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오히려 패션은 사람들의 새로운 마인드를 창출해 가는 무형의 자산으로, 파리와 밀라노 에서 쏟아지는 첨단정보와 수퍼 모델들이 평상시에 즐겨입는 프라이베이트 웨어, 스트리트 패션, 클럽웨어등 다양화되고 세분화되어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등을 공유시키는 매개체로까지 발전하고 있을 정도다.
따라서 요즘의 디자이너들은 이전과는 달리 뭔가 재미있고 새로운 것을 인정하고, 확인하고, 거기에서 순간적인 가치관을 형성시켜 나가야 하는 사명감을 안게 됐으며, 패션에 있어 신선도란 생선이나 야채와 같은 필요불가결한 요소로서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다.
누구보다 빠른 정보를 찾아내고 이를 상품에 반영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패션 비즈니스의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는 만큼, 많은 패션디자이너들은 그 새로움을 찾아 끊임없는 고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스타일에 있어서도 예전처럼 일정하게 하나의 테마를 향해 사회가 집결하는 시대가 아니므로, 기본보다는 변칙에 자극을 받고 뭔가 사람들에게 파격적인 충격요법에 강한 소위, 마켓을 잘 다루는 디자이너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눈부신 발전속에서 원로들의 이야기는 정체되어 있다.
‘너의 처음은 미약했으나, 마지막은 창대하리라’는 성경글귀가 떠오를만큼 어렵고 힘든 환경속에서 한 길만을 고집하고 걸어온 과거의 어느 길목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일제침략기의 복식사에서 시작하여, 1949년 아현동에서 시작한 양재 교육 사업, 57년 7월 최초의 패션쇼, 대한 복식디자이너협의회의 창설, 최초의 월간 패션지의 창간과 폐간등의 역사적 흐름, 그리고 처음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국제 무대 진출했을 당시의 감격, 후배들과의 엮어진 에피소드, 시대별 유행과 스타일의 변화등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떤 소설이나 드라마보다도 생생한 다큐멘타리적 의미마저 느끼게 한다.
또한, 황무지와 같은 세상에서 미약하게 뿌리내려, 70년이 지난 지금 자타가 공인하는 존경의 자리에 올라있는 그들의 의지와, 이미 너무나 발전해 버린 그들의 현재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면서 우리 패션도 혈통과 뿌리를 확고히 갖고 있는 하나의 생명체로 성장했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아마 이쯤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서전 양식의 기록 모음보다는 우리네 패션사와 함께 한 자신들의 인생의 공유에 더많은 생각이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의미에서 이제 한국패션업계는 급변하는 환경속에서 궂이 복식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지금은 사진과 이야기속에 묻혀버린 선배들의 청춘시대와 함께, 과거를 기초로 한 국내패션의 역사성과 정체성에 대한 기록의 필요성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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