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현장에서는…] 밥솥과 패션의 상관관계
[지금 현장에서는…] 밥솥과 패션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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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던 엄마가 전기밥솥을 집에 들여왔다. 블랙과 실버색상이 고급스럽게 조화된 외관을 보니 이게 정말 밥솥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림잡아 10년 넘게 가스불 조절, 뜸들이기와 전쟁을 치뤘던 엄마는 밥솥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에 혼이 나간듯 했다.

신상 솥은 자가세척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었고 엄마는 수세미로 일일이 밥풀을 떼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크게 감동했다. 그렇게 우리집 최신 밥솥은 ‘증기가 배출됩니다’, ‘맛있는 밥이 완성됐습니다’ 등등 밥의 시작과 끝을 생생하게 중계해주며 가족들에게 따뜻하고 찰진 밥을 대접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식사 중에 “그거 압력밥솥으로 지은 밥이다”라는 엄마의 무심한 말이 들려왔다. 냉담한 말투가 당황스러워 “왜 갑자기?”라고 반문하자 엄마는 “직장생활이니 뭐니해서 바쁜 너희들에게 내손으로 해줄 수 있는 건 아침마다 갓지은 밥이었는데 내 역할을 이 전기밥솥이 다 뺏어갔다. 전기밥솥이 훨씬 더 맛있고 편한 건 알지만 너네 시집갈 때까지는 내 손으로 맛있게 지은 밥을 먹이고 싶다”고 말했다.

섬유패션전문지에 뜬금없이 ‘엄마의 밥통’얘기가 나온 건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패션브랜드도 스토리가 있는, 따뜻함이 있는, 여유가 있는 옷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다. 트렌디한 상품의 디자인을 똑같이 본떠 가격내리기 눈치싸움을 지속하는 방식이 아닌, 이미 지나간 트렌드를 변주하는 대범함과 고객에게 ‘저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도 자꾸만 기억에 남는 옷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딸의 든든한 아침을 위해 새벽녘 쌀을 씻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몇년이 지나도 고객의 마음 속에 잔잔히 기억되는 상품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화려한 외국어로 치장돼 있는 패션용어와 쉽게 가보기 힘든 세계 여러나라에서 찍은 스펙타클한 화보도 물론 필요하지만, 박박 긁은 누룽지처럼 고소한 향취가 나는 정감있는 우리만의 룩, 에펠탑보다 남산타워를 사랑하는 패션브랜드를 만나고 싶다. 만약 ‘오버히트 디터쳐블 다운 점퍼’가 아닌 ‘1978년 우리 아빠가 20살 때 입던 패딩’을 보게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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