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는 21세기판 암행어사
일전에 한 신문에서는 21세기판 암행어사로 평론가라는 존재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음식평론가’‘모니터요원’‘화장실평가단’등. 보이지 않는 ‘암행감찰’과 그에 따른
객관적이고 날카로운 평가를 통해 각 분야의 발전을 자극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는 이들
평론가들의 특징은 절대로 신분노출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예를들어, 음식평론의 경우, 신분을 알리고 음식점을 찾아갔던 탓에 공정한 평가가 나오기
어려운 분야의 하나. 레스토랑별로 벌점을 매기는 프랑스의 ‘미슐랭가이드’처럼 믿을
만한 음식평론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한 음식 평론가는 언론매체와의 인터뷰때 절대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얼굴이 알려지면 공정한 음식평론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얼굴을 알면 음식 맛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설명이 붙은 만큼, 맛있는 음식점을 찾
아내는데 있어, 철저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전문가적 자세에 놀라움과 존경을 동시
에 표한 대목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관심으로 방치된 영예의 직함
이처럼 평론가는 해당 분야에 있어 남보다 월등한 지식과 안목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철
저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객관성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누구나 존경할 수 있는 인덕과 품위를 갖추고 있다면, 날카로움의 한편에서 덕망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이시대 최고의 직업이라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바닥의 알만한 중견디자이너와 원로들의 속성과 이력에 대해 끔찍하
리만큼 샅샅이 알고 있으나,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평론이 있다.
언제나 원망과 자학, 그리고 열등감과 우월감이 뒤범벅된 독선적인 문체로 패션전체를 언급
하는가 하면, 자신이 제외된 모든 행사를 가차없이 비난하고,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자신
의 기분과 이익에 따라 추켜세우기 일쑤이다.
물론, 이럴때의 명분은 늘 ‘자신의 생존권 문제’고 ‘권리’이다. 자칭‘왕따’로서 고독
하지만, 스스로는 독립군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으므로, 그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철저히 주
위를 무시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패션이란 때때로 뭘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때가 많지만, 늘 항상‘그러려
니’하는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별다른 문제없이 그럭저럭 통과되곤 하니까, 그것도 별
문제가 없는듯 보인다.
그러나 이전부터 “의례 그래 왔던 것”이라는 의식이 팽배되어 있는 사이에 영예로운 이름
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는 것은 명백히 이 업계의 잘못이다.
이로 인해 무관심과 체념으로 인해, 자신의 이해와 결부시켜 흑색 유언비어를 흘리거나 반
대세력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여, 그 힘에 무임승차하려는 의도가 평론이라는 이름하에 매도
되어 버리는 사실에도 무감각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과 혁명가의 차이점
현실은 잘못되었다. 기필코 수정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전세계 어느 시대고 시인과 혁명가들이 뜻을 같이 하고 있는 테마이다.
그러나 어떤 현실개조의 의욕에 있어서는 같은 꿈을 꾸고 있지만, 그러나 두사람은 절대 손
을 잡지 못한다.
혁명가는 제가 뜯어고친 새로운 현실을 지키기 위해 삼엄한 경비를 배치하지만, 시인은 뜯
어고친 그 새로운 현실도 또 뜯어고쳐야 할 대상으로 다시 봐야한다는 데서 혁명가와 시인
이 갈라설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평론도 마찬가지이다.
한 문화의 발달을 위해서, 혹은 그 분야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등등, 목적은 각기 달라
도 철저한 분석력과 통찰력에 이의를 제기하기 보다 고개를 절로 숙일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마치 시인의 그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이곳에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때로는 시인이고, 때로는 혁명가라는 양손의 떡
을 쥐고 싶은 사욕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에게 베풀고, 어른으로서 존경받기보다는 끝까지 챙겨주고, 알아 모셔주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버르장머리 없는...”이라는 말로 호통을 치는 바람에, 사람을 이유없이 당
황하게 만들기도 하는 구태의연함의 투영 그자체일 뿐이다.
존경받는 원로와 구분돼야
그러므로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에는 아무 관심없이 그저 모든 것을 자
기의 중심에서 좌지우지 하고 싶어하는 비전문가의 검증없는 비평과 공공연한 개인적 신상
모독은 이유없는 찬사만큼 공해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어설픈 눈으로 보아도, 흔히 서양에서 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바탕으로 패션계의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날카로움은 없다.
귀족적이고 풍요로운 삶속에서 그런 정신적인 에너지가 완숙되는 것이라고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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