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경제의 데이터 주권마저 미국과 아시아에 빼앗기고 고심하던 유럽이 드디어 회심의 카드를 뽑아 들었다. 유럽 27개국은 EU 역내에서 판매하는 모든 물리적 제품에 의무적으로 디지털제품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 DPP)을 부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EU는 2019년 기후위기 대응과 산업경쟁력 제고를 위한 그린 딜(Green Deal)을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신순환경제 실행계획을 발표하였다. 임대, 공유, 재활용 등의 방법을 통해 제품 사용기간을 연장하고 자원의 절약과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또 지속가능 순환섬유전략에 이어 에코디자인 규정을 발표하면서 ESG 정책의 경성 규범화를 선도하고 있다.
QR라벨에 지속가능을 담으세요
기존의 선형경제 모델을 순환경제로 전환하기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에 따르면 제품의 지속가능성은 내구성, 재활용 용이성과 수선 용이성, 재생원료 함유비율 그리고 탄소발자국 등을 고려하여 기획되어야 하며 미판매된 제품의 폐기를 금지하는 조항도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에코디자인의 핵심은 역시 DPP라고 할 수 있다.
DPP란 제품 전체 수명주기에 걸친 정보를 QR코드 등의 전자표식에 담아 라벨로 부착하는 시스템으로 소비자들은 모바일 스캔을 통해 지속가능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
DPP는 각종 환경규제를 준수하기 위해 디지털 기반의 공급망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취지가 내포되어 있는 제도로 친환경적인 제품의 기획, 생산, 소비를 위해 시작되었으나 점차 사회적 책임과 투명경영 성과까지 확장되면서 ESG 이행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지속가능과 매출을 한번에
EU는 전자제품과 배터리 그리고 섬유제품에 대해 DPP를 우선 도입하고 점차 확대할 예정인데 타업계와 달리 섬유패션업계는 도입취지를 받아들이고 발 빠르게 준비를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업계 특성상 생산, 소비, 폐기까지의 주기가 짧아 환경단체로부터 끊임없이 환경오염을 지적받아 왔기 때문이다.
LVMH와 프라다, 까르띠에 등의 럭셔리 브랜드들은 정품보증과 소유권 정보를 통한 위조품 유통 대응에 나섰으며 타미 힐피거, 캘빈클라인 등도 수명주기와 재활용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도 가니, H&M, 막스앤스펜서, Pangaia 등도 선제적으로 DPP를 도입하고 있다.
이들이 DPP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 것은 DPP부착이 제품의 신뢰도와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여 고객확보와 매출증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는 많은 해외 컨설팅 업체들의 조사에서도 입증되고 있으며 지난 6월 발표된 지속가능패션이니셔티브의 설문조사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향후 DPP가 범람하면서 2030년까지 섬유패션분야에서만 625억개가 넘는 DPP가 생성될 것이라는 ABI리서치의 전망은 차치하더라도 DPP가 소비혁명을 주도하면서 섬유패션업계의 판도를 바꿀 새로운 도구가 될 것임을 의심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C레벨 차원에서의 도입 검토해야
이처럼 DPP가 지속가능과 매출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국내 패션업체들도 관심을 갖고 C레벨 차원에서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ESG를 선도하고 있는 대형브랜드뿐만 아니라 친환경 가치를 추구하는 디자이너브랜드와 아웃도어스포츠브랜드, 환경과 유해물질에 민감한 내의류와 유아동복 그리고 MZ세대를 타겟으로 하는 캐주얼 브랜드들은 우선적으로 도입을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디지털 솔루션 기업인 패션프루프가 섬유패션 전용 DPP를 개발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패션프루프의 DPP플랫폼은 정보등록에 따른 입력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업체들의 ESG 경영성과를 홍보할 수 있는 세션을 추가함으로써 중소 섬유패션업체들이 별도의 IT개발 비용부담 없이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려운 시기임도 분명하지만 순환경제와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실현을 위해 DPP가 필수적으로 시행되어져야 함도 분명하다.
지속가능한 기업,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자신들의 정보를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그리고 충분히 소비자들에게 제공하여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