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60주년 맞은 국정사
연말까지 양복개인전 진행
원타임시스템으로 더욱 유명
#최고의 양복 기술자가 되리라
제주도 출신의 한 젊은이가 큰 곳에서 기술을 배워보겠다는 일념으로 1960년대 중반 무작정 부산을 찾았다. 부산항에 닿고 보니 코 앞이 바로 남포동과 중앙동. 300여곳의 양복점이 이 일대에 모여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젊은이는 양복만드는 기술을 배우기로 작정하고 어렵사리 한 양복점에 취직한다. 그러나 어린 풋내기에게 선뜻 기술을 가르쳐주는 이가 있을리 만무했다. 청년은 밤낮없이 책을 파고들며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양복만드는 기술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최고의 양복기술자가 되리라’고 다짐한 청년은 1981년 궁극적 목표로 삼았던 국정사를 찾아간다. “저에게 최고의 양복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청년이 제 집을 찾아드는 순간이었다. 1대 故 김필곤 사장도 당시의 양씨를 꼼꼼히 살피면서 그에게 부탁했다. “최고의 양복을 만드는 국정사를 오래도록 지켜달라….”
이 청년이 바로 국정사의 3대 사장 양창선씨다. 부산 중구 남포동에 위치한 맞춤 양복 전문점 국정사는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지난 1948년 부산양복협회 초대 조합장을 지낸 김필곤(작고)씨가 설립한 이래, 2대 김영곤(82)사장을 거쳐 3대 현재 사장인 양창선(59)씨에 이르기까지 60년 세월 속에서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양창선 사장은 대한민국 명장(2005년 지정)으로써 국정사에서 40년 세월을 지켜오며 ‘최고의 양복기술자가 되겠다’는 젊은 시절의 다짐을 실현시켰다.
오늘날 국정사가 더 특별한 이유는 양 명장을 중심으로 전국기능대회서 금메달을 휩쓴 14명의 기술자들이 국정사의 인적자원들로 구성되어있다는 것. 그래서 양 명장은 역사나 규모, 질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양복점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힐것이라고 자부한다.
#1만 2천여 바늘땀에 담은 장인정신
현재 국정사의 단골고객은 1500명에 이른다. 한 가족이 4대를 이어 국정사를 찾기도 하고, 50년 째 찾아오는 단골고객등 유명 인사들이 많다. 대체 양 명장이 만든 양복은 다른 제품과 어떤 점이 다를까.
“손님의 몸 치수를 잴 때 체형과 근육의 발달 정도를 함께 봅니다. 그런 것들을 꼼꼼히 측정하기 위해서 고객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체형을 만져 보고 난 다음에야 제대로 된 옷을 만들 수 있죠. 양복 한 벌을 완성하는데는 1만 2천여 바늘땀이 들어갑니다. 완성하는데만 닷새가 걸리죠. 한땀한땀 혼신을 다해 만든 옷이 일반 기성복과 같을 수 없죠. 흔히 옷은 제 2의 피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만든 옷은 20대의 생기있는 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제 옷을 고객들이 먼저 알고 찾는거죠.”
그러나 양 명장이 명장으로서가 아닌 요즘 더욱 유명해진 이유가 있다. 국내 최초 One-time system을 개발, 라인작업을 시도하여 기존의 제작공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것이다.
‘원타임 시스템’은 사회가 점점 바빠지다 보니 양복 한 벌을 맞추면서 예전처럼 치수재기, 시침질, 마무리 작업등을 위해 고객을 여러 번 양복점으로 오게 하기는 힘들어진 것이 사실. 그래서 한번의 방문으로 모든 공정을 끝낼 수 있도록 한 게 원타임 시스템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형을 세분화한 뒤 치수와 색깔에 맞춰 표본을 만들고 그것을 기준으로 즉석에서 일관된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기성복의 장점을 수제품 제작에 녹여 넣은 것. 이쯤되니 양 명장의 양복가격이 궁금해졌다. 우리나라 최고급 계층이 선택하는 옷의 가격은 얼마일까. 진열된 양복의 가격표를 보니 평균 220만원선. 여기서 양명장은 “최고급 원단을 쓰면 더 비싸다”고 말했다.
하긴 값을 알면 뭘 하겠는가. 명품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가격이라는 것은 허울에 불과할 따름인데.
#핸드메이드의 진수를 보여주다
양명장은 부산의 맞춤 양복점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부산 광복동 거리는 한 때 300여점이 성업했던 맞춤 양복점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현재 10여곳으로 줄어들었다. 맞춤 양복이 사양업종으로 하향길에 내려선 것이다.
“그 세월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기성복이 밀려왔고 IMF의 힘든 시기도 겪었습니다. 오직 ‘기술’과 ‘장인정신’으로 힘든 시기를 버텼습니다.”
양 명장은 문을 닫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