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드해설 최초 기고로 대중적 관심 모아
영화배우들도 긴장했던 모델 촬영 시작
당시 우리나라의 여성지로는 학원사(사장 金益達)에서 발행된 ‘여원’과 ‘여성계’가 있었다.
‘여원’은 그때 대표 종합지던 사상계나 현대 공론이 3천부를 못넘기던 상황에서 창간호로 1만부를 찍어낼만큼 앞선 마인드를 갖고 있었던 잡지였다.
그 여원(女苑)이라는 잡지에서 여성 의상의 사진과 해설이 든 모드란의 기획을 맡게 됐다.
▲ 국내 유명스타들이 패션모델로 등장했던 50년대. 최경자 여사가 모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 ||
의욕만 갖고 한국 최초의 모드란을 맡기는 했지만 막상 일을 하려니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거듭 이야기 하거니와 모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당시 세계적인 패션의 경향이 어떤지 최신 정보를 알기란 그때 상황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참고할만한 것이라고는 두 해씩 묵은 일본의 부인잡지나 미군 기관에서 흘러나오는 낡은 카탈로그 따위가 고작이였던 시절이였으므로, 세계적인 유행추세가 어떤 것인지도 모른채 내자신의 머리를 한껏 짜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우선 일반의 눈에 익지 않은 새로운 스타일이어야 가장 모던한 디자인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모드가 실릴 11월호에 맞추어 가을 기분이 나는 원피스와 슈트, 그리고 코트를 각각 두세점씩 만들어 내기로 했다.
옷이 완성되자 촬영을 하는 일도 큰 문제였다.
▲ 당시 최고의 모델은 영화배우 출신들이었다 | ||
의논 끝에 촬영은 사진작가 이건중씨(전 사진작가협회장), 모델은 당시 인기 절정의 영화배우이며 우리집 단골 고객인 최은희씨와 노경희씨가 각각 맡게 됐다.
덕수궁에서 촬영을 하는데 사진을 찍는 사람도 모델을 서는 사람도 모두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굉장히 흥분해서 시간 가는것도 모르고 열중했다.
그통에 최은희씨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 스케쥴을 깜빡 펑크를 내서 신감독이 불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로케장이 비상이 걸렸다는 후문이였다.
영화 카메라 앞에서는 일류급연기자인 최씨와 노씨였지만, 난생 처음 해보는 의상 모델 노릇엔 역시 서툴러서 포즈를 어떻게 취해야 할지도 몰랐고 체격도 양장이 썩 어울리게 날씬한 팔등신이 아니어서 카메라의 각도를 잡기도 어려웠다.
그런대로 사진이 실린 잡지가 발행되자 한국 최초의 모드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여원에서 내작품을 봤다는 인사였고 사진이 실린 책을 들고 찾아와서 그 것과 똑같은 옷을 만들어 달라는 손님도 많아 더욱 바빠졌다.
양장을 하지 않아서 모드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여성들이나 심지어 남성들조차 모던한 느낌의 옷을 입은 인기배우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모드란은 매달 3~4페이지씩을 차지하는 중요 고정란이 되었고 다른 여성지도 여원과 같은 모드란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해졌다.
서수연씨와 노라노 여사등이 참가하면서 점차 의상 디자인에 대한 일반의 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