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섬유신문에 비친 고 이건희 회장 발자취
‘인재·품질’ 위주 소프트파워로 초일류기업 일궈
“존경하는 원로 회장님과 고문 여러분! 친애하는 삼성가족 여러분! 본인은 오늘 지난 반세기 동안 삼성을 일으키고 키워 오셨던 창업주를 졸지에 여의고 이 자리에 서게 되니 영광에 앞서 그 책임감이 너무 크고 무서움을 느낍니다. (중략)
앞으로 우리 삼성은 수성과 개혁의 시대적 요청과 사내외의 여망에 적극 부응해 나갈 것이며 이를 위해 본인의 경영에 대한 소신을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 합니다. 우선 본인은 삼성이 지금까지 훌륭한 전통과 창업주의 유지를 계승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이며, 개인의 독선보다는 다수의 의견과 조직을 우선하고 책임경영과 공존공영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 사업보국·인재제일·합리추구의 경영이념을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둘째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중략)
인재를 더욱 아끼고 키우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개성과 창의를 존중하고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교육시키며 그들에게 최선의 인간관계와 최고의 능률이 보장되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 (중략)
끝으로 삼성은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사회에 공급하고 건실한 경영을 통해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지금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이상으로 봉사와 헌신을 적극 전개할 것입니다.” (한국섬유신문 1987년 12월 3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취임사’ 중)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0월 25일 향년 78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고 이건희 회장은 창업주이자 아버지인 이병철 선대회장의 별세 후 12일만인 1987년 12월 1일 삼성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당시 10조원대이던 매출은 2018년 387조원, 그룹시가 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괄목상대한 성장을 이뤘다.
그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던 1987년 삼성물산은 7억5100만 달러로 국내 섬유수출 1위 자리를 확고히 했다(한국섬유신문 1988년 1월 11일자 ‘87년도 섬유수출 2백대기업 수출랭킹’ 중). 당시 2위는 대우(7억 2000만달러), 3위는 한일합섬(4억7000만 달러)였다.
고 이건희 회장은 섬유, 비료, 설탕 등 전통 굴뚝산업에 의존하던 삼성그룹을 전자, 반도체 등 21세기형 성장산업 위주로 사업구조를 개편, 수성(守成)에서 나아가 제2의 창업을 이룬 보기 드문 2세 경영인이었다. 특히 대량생산과 소비시장에 의존하던 한국 기업 경영 관행을 인재위주, 품질위주의 소프트 파워로 쉬프트(shift) 한 경영인이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다 바꿔라”는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1995년 구미사업장에서 불량 휴대전화 15만대를 모아 불에 태우는 ‘화형식’은 엄청난 충격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삼성그룹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경제 전반을 바꾸는 대 변혁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그가 전통 산업의 중요성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고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체질개선을 도모하는 한편, 1987년 회장 취임 이후에도 섬유패션 업종의 발전을 위해 지속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중소협력업체 해외진출 지원(한국섬유신문 1987. 12. 14), 삼성물산 기성복 제조공장 설립(1987. 12. 24), 삼성물산 협력사 인센티브 부여해 수출의류 고급·고부가가치화 적극 도모(1988. 03.31) 등 업계와 상생 발전하는 다수의 모범 사례를 남겼다.
1987년 처음으로 1000억원 매출을 달성한 당시 삼성물산 에스에스패션은 2000년 내수의류 매출 1조원 달성 등 섬유와 패션을 축으로 한 청사진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내 섬유패션 업계는 주말 벽두에 전해진 고 이건희 회장 타계 소식에 깊은 안타까움을 표하며 추모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