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나무 그리고 프랙탈
깃털의 모습은 나무와 닮았다. 섬유 형태인 털의 표면적이 커지려면 단면의 모양을 변형한 ‘이형단면(異形斷面)’이라는 방법으로 자체의 표면적을 키우는 방법도 있지만, 털이 그룹을 형성하여 특별한 형태를 만들 수도 있다. 풀과 나무를 상상해 보면 된다.
식물은 모든 에너지를 태양으로부터 얻으며 최대로 에너지를 획득하는 방법은 빛을 받는 수광부의 표면적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풀이 표면적을 늘리는 방법은 풀잎의 개수를 늘리고 표면을 텍스쳐(Texture)하게 만들며 형태를 되도록 가늘고 길게 뽑는 것이다. 그런데 육상에 풀들이 많아지면서 그늘이 생기자 이른바 ‘일조권’ 문제가 발생한다. 이제 키 작은 풀들은 표면적과 상관없이 햇빛을 받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풀들의 키 크는 경쟁이 시작됐다. 하지만 키가 커지는 전략은 얼마 안 가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풀잎은 연약하기 때문에 휘어져, 길어지거나 높이 뻗는데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비행 대신 보온력을 극대화한 깃털
깃털은 비행과 보온, 두 기능의 달성을 위해 진화했고, 충돌하는 각 기능이 요구하는 최저 사양으로 인해 각각 어느 정도의 희생과 절충이 필요하다. 즉, 비행을 위한 최적 조건은 가능한 적은 수의 깃털을 유지하는 것이고 최대 보온을 위한 조건은 가능한 많은 깃털을 가지는 것이다. 각각의 기능을 만족하기 위한 최적의 깃털 수는 골디락스 영역에서 타협점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만약 비행이 불필요한 새라면 깃털은 오로지 한가지 기능에만 충실하면 되고 비행을 위한 경량화 때문에 희생했던 깃털 수의 제한에서 풀려나 최대로 보온 장치를 가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새는 털보다 보온기능이 뛰어난 깃털을 대량 장착할 수 있으므로 어떤 육상동물보다 보온에 더 유리한 조건이 되어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곳에서도 살 수 있다. 펭귄이 바로 그렇다.
사실 펭귄 크기의 작은 항온동물이 추운 지역에 사는 것은 크게 불리하다. 베르크만의 규칙에 의해 추운 지방은 비표면적이 작아 체온을 뺏기기 어려운 덩치 큰 동물이 살기 적합하다. 매머드나 북극곰이 멋진 예이다. 그런 북극곰조차 포근하고 풍성한 흰털을 가졌지만 비표면적이 훨씬 더 큰 펭귄은 곰보다 몇배나 더 숫자가 많거나 보온기능이 탁월한 털을 보유해야 생존이 가능하다.
보온에 관여하는 털의 조건은 굵기와 밀도이다. 털이 더 많을수록 더 가늘수록 강풍에도 무너지지 않는 더 강력한 공기층을 형성할 수 있어 보온에 유리하다. 밍크의 털은 1제곱인치 안에 무려 백 만개의 털이 있다.
두 번째 조건은 밀도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수의 깃털을 가진 새는 펭귄이다. 황제펭귄의 깃털은 대략 8만 개나 된다. 일반 새가 1500에서 3000개의 깃털을 가진 거에 비하면 50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날 수 있는 새는 무거워서 그렇게 많은 깃털을 가질 수 없다.
초고밀도인 펭귄의 깃털은 보온 기능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었을까? 공기와의 마찰계수를 최소로 하기 위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비행하는 새들의 깃털과는 달리 펭귄의 깃털은 마치 육상동물의 털처럼 표면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으며 거의 수직으로 서있다. 털의 높이는 공기층의 두께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는 잠수복으로 사용되는 두꺼운 네오프렌 형태와 많이 닮아 있다. 물론 둘의 목적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