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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이란 긴 세월동안 일본은 군국주의(軍國主義)의 기치
아래 빚어내어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어 유구한 우리 민
족과 그 문화 그리고 강토의 구석구석까질 수탈(收奪)해 버
렸었다.
그 장구한 세월 일본은 우리의 <국어>조차 말살하려 했고
마침내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일체라는 뜻)
」를 주창하여 민족의 존재를 병탄(倂呑)하려 들었던 것이다.
일본이 미국등 연합국과 역부족의 세계2차대전을 지속하기
위해 그나마 부족했던 우리나라의 인적(人的)·물적(物的)의
자원을 있는대로 앗아갔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
▼일본이 미국들과 전쟁을 하던 1940년대 초서부터 45년 해
방이 되고 난 뒤에도 그랬지만 서울시민의 <복장>이란 거의
그들이 강요하던 「국민복」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
국민복」의 형태를 잘 모를지도 모른다.
남성의 경우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중국의 <모택동>이나
<등소평>등이 입었던 앞단추 다섯개 달린 양복이 그것이다.
여성은 <몬페>라는 이름의 바지아랫도리에 고무줄을 넣어
조린 모양의 것이었다(요즘도 이따금 농촌여성들이 입고 일
하는 것을 본다).
따라서 남성의 정장(正裝)이래야 일부 지식인(신문기자나 예
술가)을 제외하고는 넥타이를 맨 신사란 보기 힘들 지경이었
다.
이들도 1주일에 한·두번씩은 꼭 넥타이를 풀고 <국민복>을
입어야만 했다(국민복 입는 날이 지정돼 있었으니까).
36년동안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植民地) 정책이란게 재
미있었다─.
그들은 고맙게도(?) 조선의 지식층에겐 되도록 후하게 대접
을 하되 무지몽매(無知蒙昧)한 농어민과 서민들에겐 가차없
는 탄압을 가하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이땅에 해방은 왔지만 거의가 헐벗은 모습이었
고 <중류>이상의 조선사람들이래야 국민복차림이었다. 간혹
꾸겨진 <넥타이>를 맨 후출그레한 신사들을 목격할 수 있었
으니 알 만하지 않는가─.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나서부터 많은 <민간구호물자>라는
이름의 옷가지들이 쏟아져 들어 왔다. 그런데 이것들의 태반
은 어찌된 농간인지(?) 「시장상인」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케네디 시장」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구호물자시장>
이 형성됐다.
서울은 남대문시장이 본고장이었고 부산은 광복동의 <국제
시장>이 그 천국(?)이었다.
당시 이것들은 이름이 <구호물자>이지 얼마 입지 않은 듯
싶은 옷들과 일찌기 보지 못했던 호화찬란(?)한 멋진 디자인
에다 컬러풀해서 선듯 입기가 거북할 정도의 것들이었다. 이
러한 가지각색의 구호물자에서 느낀 것은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잘 살기에 이렇게 멀쩡하고 멋진 옷가지를 <남한>에
다 산더미같이 보내줄 수 있나? 하는 부러움이었다.
▼좀 우스꽝스런 얘기지만 당시 미국이 보내준 <구호물자>
의 한 두 가지를 몸에 걸쳐보지 않은 조선사람은 드물 것만
같다.
명동에서 매일 만나는 한 여류화가의 오버코트는 참으로 멋
진 컬러에다 새로운(?)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말할
나위없는 <케네디 시장>의 상품이어서 어딘지 씁쓸한 심정
이었던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가난했던 우리가 불과 몇년 사이에 고도의 경제성
장으로 근자에 와서는 아프리카와 북한 등지의 난민에게 의
류등 구호물자를 보내주게 됐다.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 발맞춰 사치와 과소비가
난무했다. 아파트에선 멀정한 옷가지들이 아낌없이 버려지고
가전제품에다 가구들까지도 쓸만해 보이는 것들이 쓰레기통
옆에 산더미로 쌓였다.
▼그러던 것이 작년말부터 불어닥친 IMF의 회오리가 우리
모두에게 값진 경종을 울려줬다.
─새삼 물자의 고귀함을 ─절약의 소중함을─ 우리가 가난했
던 지난날의 알뜰하고 검소했던 생활을 뼈아프게 일깨워 줬
던 것이다.
─영국인들의 시민질서의식이나 절약정신은 새삼스럴게 없지
만 런던의 한 <벼룩시장>에선 요즘도 「헌 속 옷가지」를
들고 나와 사고 파는 사람들이 있어 놀랍다─이 얘기는 우리
가 정녕 귀담아 들을만 하지 않는가─.
趙 能 植 (本紙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