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로 한국경제 발전 초석 다져
한국 섬유 산업화의 거목,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8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이 명예회장은 1922년 경북 영일군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대 정경학부를 2년 수료하고 귀국후 故이원만 코오롱 창업주를 도와 한국 섬유산업의 기초를 세우는데 헌신했다. 1957년 설립된 ‘한국나이롱주식회사’는 국내 최초 나일론사를 생산, 한국 섬유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당시 나일론사는 큰 인기를 얻으면서 품귀현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1968년 설립된 코오롱상사는 나일론사의 판매전담회사로 나중에 그룹사를 일구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그는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를 신념으로 임직원을 비롯한 사회의 문제들을 따뜻한 보살핌으로 살피는 공동체적 책임경영을 실천한 대표적인 경영인이었다. 1982년 어려웠던 경제환경 속에서도 누구나 맡기를 꺼리던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맡아 이후 14년간 협회를 이끌면서 바람직한 노사관계정립에 힘쓴 것도 이 같은 경영철학에서 나온 것이었다. 1983년에는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에 취임, 섬유인들의 오랜 숙원인 ‘섬유백서’를 발간하는 등 한국 섬유산업 선진화에 매진했다.
1989년 경제 5단체가 참여하는 경제단체협의회 창설을 주도해 한국 경제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노사문제를 풀어나가는 주역으로 활동했고 1990년에는 노사와 공익대표가 참석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이 명예회장이 1994년 근로자가 정당한 승진과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경영자와 종업원이 다 함께 노력하자는 내용의 ‘보람의 일터 운동’은 현재 코오롱그룹의 경영방침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 같은 정신은 후일, 산업계 전반의 노사 갈등이 극으로 치닫던 2007년 항구적 무분규를 골자로 하는 노사상생동행을 선언하는 기초가 됐다. 강성 노조로 경쟁력을 잃어가던 화섬업계에 노사 상생기류를 확산시키고 기업의 실적 또한 크게 개선되는 전환점을 만드는 계기였다.
고인은 1982년 기업인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 1992년 개인에게 수여되는 국내 최고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수상하는 등 49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존경받았다. 그는 1945년 신덕진 여사(2010년 작고)와 결혼해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을 비롯한 1남5녀를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