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도 신용도 따라 차별대우
대구에 생산공장을 갖고 있는 K사 김 모 대표는 최근 수출보험공사를 찾았다가 낭패를 봤다. 중동 지역에 수출하기로 맺은 500만달러 계약에 대한 환헤지를 하려고 했다가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수출 대금을 6개월 뒤인 내년 5월께 받기로 돼 있어 내년 환율이 급락(원화 강세)하면 막대한 환차손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 때문에 현 시세보다 20원가량 낮은 환율로라도 헤지를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출보험공사는 지금 상태에서 환헤지를 할 수 있는 규모가 최대 50만달러라면서 헤지 계약을 받아줄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에 제품을 수출하는 중소기업 C사도 최근 50만달러짜리 환헤지를 하기 위해 수출보험공사를 방문했지만 똑같이 ‘환헤지 계약 불가’ 판정만 받았다.
현재 공사는 석 달 안에 수출대금을 받는 수출 계약에 대해서만 헤지를 할 수 있다는 방침이다. C사는 수출대금을 6개월 뒤에 받게 돼 있다. 결국 C사는 환헤지를 위해 한국씨티은행 외환은행 등 시중은행을 찾았지만 똑같은 답변만 받았다. 이 회사 이 모 대표는 한 은행 관계자에게서 “수출보험공사에서도 환헤지를 하지 못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느 은행이 수출계약에 대해 환헤지 계약을 체결할 수 있겠느냐”는 말만 들었다.
올해 원화값 폭락으로 대규모 환손실을 떠안은 기업들이 이제는 환헤지를 하려고 나서도 정작 받아주는 금융회사들이 없어 비상이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소기업 환헤지 계약에 대해선 이미 두 달 전부터 금융회사들이 사실상 중단시켜버린 상태다. 대기업들도 신용도에 따라 은행들이 선별적으로 받아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중견기업인 D그룹 관계자는 “은행에서 3개월 정도 단기상품만 받아주고 그 이상은 아예 취급하지 않고 있다”며 “대기업이 이 정도면 중소기업은 일절 안 받아준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원·달러 환율 폭등으로 멀쩡한 회사에 대규모 적자가 난 사례가 많은데 은행들이 자기만 살려고 환헤지를 거부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원유 도입 시점과 대금 납부 기간에 시차가 있어 환헤지를 통해 위험을 회피해야 하는 정유업계가 당장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보통 정유사들은 원유 도입 시점보다 대금 결제시점에 원화값이 떨어지면 환차손을 입기 때문에 달러선물 같은 상품을 이용해 환헤지를 걸어놓는다. 문제는 최근 금융회사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일절 받아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업계에서는 환헤지를 하기 어려워 과거보다 위험에 노출된 거래 규모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환율이 여기서 더 상승한다면 피해가 확산될 수 있다”고 염려했다.
국내 항공사 외환담당자도 “최근 환율이 급등락을 거듭하고 있긴 하지만 기업의 환헤지 요구를 받아주는 사례는 찾기 힘들 것”이라며 “환헤지를 받아주려면 은행들이 달러자산을 따로 확보해야 하는데 요즘 연말을 앞두고 유동성 확보에 총력을 펼치는 은행 처지에서는 환헤지를 받아줄 형편이 못 된다”고 설명했다.
은행들도 할 말이 많다.
한 시중은행 담당자는 “지금 같은 고환율 시대에 선물환을 받아주기 위해 외화자산을 갖고 있으면 은행 전체 자산 크기가 높게 평가돼 자기자본 대비 자산인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이 내려간다”며 “BIS 비율 때문에 은행들에 비상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외화자산을 추가로 보유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여기에 외국계 금융회사들이 이러한 환헤지 계약을 넘겨받지 않는 점도 기업들 환헤지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불안해 보이는 원화 선물환을 사줄 외국 금융회사가 없다는 얘기다. 또 다른 시중은행 담당자는 “키코 사태로 은행들이 봉변을 당하면서 크게 위축된 상태”라며 “환헤지 수단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라 앞으로 환율이 안정되더라도 기업들은 헤지 대상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성근 기자
■ <용 어>
환헤지 =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없애기 위해 현재 수준의 환율로 수출이나 수입, 투자에 따른 거래액을 고정시키는 것을 말한다. 가령 섬유업체가 현재 원·달러 환율로 환헤지 계약을 맺는다면 앞으로 달러 대비 원화값이 급변하더라도 원화 기준의 수출계약 금액은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