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다 했지만 부딪쳐 보고 싶었다”
정글같은 패션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꿈을 만드는 신진 디자이너들, 음지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는 기성 디자이너들도 모두 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본지는 이번 연재를 통해 ‘나만의 옷을 만드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신예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힘들지만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본업에 매진하는 이들이 있기에 한국 섬유패션산업 미래는 밝다.
참 잘나가고 있었다. 홍익대학교 대학원 시각디자인과를 나와 그래픽디자인 회사에서 아트디렉터를 거쳐 부장으로 진급하기까지, 15년동안 한 우물만 팠던 그는 누가봐도 성공한 인생이었다.그러던 그가 돌연 패션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근무 시간이 끝나면 일주일에 두번 꼬박 학원에 나갔다. 성에 안찼는지 2010년엔 사직서까지 냈다. 그래픽디자인의 실력자로 돈 잘 벌던 그가 하루 아침에 신진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남성복 ‘범’의 김범(46) 디자이너는 바로 이런 다이나믹한 결정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말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3년동안 죽어라 디자인만 했던 것 같아요. 준지에 다니던 패턴사에게 패턴도 따로 배웠고요. 다행히 시각디자인 작업을 오랫동안 해와서 그랬는지 점점 일이 재밌더라고요. 사표를 던졌던 저에게 다들 미쳤다 했지만 저는 자신이 있었어요. 직접 부딪쳐 보고 싶었습니다.”2012년, 그는 남성복 범을 런칭했다. 나름 준비기간을 거치고 입성한 패션계였지만 시작은 험난했다. 패션계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터라 공장 컨택에 있어서도 애를 많이 먹었다. 그는 “직접 원단을 한뭉치 가져가서 공장 투어를 다녔었다”며 “젊진 않았지만 그 때 고생했던게 안주하지 않고 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쉬지 않고 열심히 뛰어다닌 보람은 디큐브에서 진행됐던 디자이너 팝업스토어에서 매출 1위를 하면서 나타났다. 실력을 체크하러 나간 중앙패션대전에서 금상을 탄 이후에 처음 맛보는 성과였다. 그 후 디큐브는 범의 첫 단독매장을 제안했고 김 디자이너는 그 곳에서 다양한 연령층의 남성이 어떤 옷을 원하는지, 고객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건지를 깨달았다. 김 디자이너의 노력과 감성이 담겨있는 범은 패션과 그래픽디자인을 크로스오버한 듯이 구조적이면서도 독특한 매력이 가득하다. ‘내가 직접 입고 싶은 옷’을 만드는 게 그의 철학인 만큼 범 제품을 보고 있자면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옷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해체한 나비 날개를 모티브로 한 제품은 국내 연예인들이 개인적으로 사서 입을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세계 시장에 진출해 글로벌 브랜드, 장수 브랜드라는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다는 김 디자이너는 아직 갈길이 멀다고 말한다. 더 잘해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 한다. 하지만 매장에 꾸준히 찾아오는 중국인 바이어들을 보니 꿈은 곧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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