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자 © 한국섬유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 이상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는 범하지 말자. 섬
유업계가 새한·금강화섬 사태와 관련 화섬업계에 던지
는 화두다. 혹자는 말한다. 잃어버릴 소라도 있는가 라
고. 또 다른 혹자는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
지 않는가 라며 반문한다.
최근 섬유업계의 이슈는 화섬산업의 진로다. 그래서 화
섬산업을 놓고 다양한 질문과 해법도 설왕설래한다. 모
두 화섬산업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반증
이다. 문제는 大馬不死는 반상의 격언에 불과했다는 점
이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를 지탱하는 가
늠자다. 오직 힘있는 자만이 삶과 행복이라는 과실을
탐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그대로 적용
되는 틀이다. 그러나 깨진 틀에서의 공정한 경쟁은 이
미 의미를 잃은 상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같은
경쟁구도가 판친다.
인간이면 누구든 한번의 실수는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재기를 위한 기회를 부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불신이 난무
하는 사회는 인간사회가 아니다.
삼국지를 읽다보면 七縱七擒이라는 말이 나온다. 촉의
대승상 제갈량이 南蠻정벌에 나서 남만의 절대자 맹획
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사로잡은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제갈량의 위
대함을 나타낸 극찬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제갈량의 속뜻은 다른데 있었다. 제갈량은 위·
촉·오가 대립한 상태서 천하장악의 걸림돌은 무엇보다
도 촉의 배후에 있는 남만 국가들의 위협이었다. 배후
가 안전해야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특히 그중 맹획은 남만 국가들을 대표하는 맹주라는 의
미에서 그를 꼭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맹획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모자
람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주는 인간적인 신뢰를 보냈다. 자기의 모자람을 알
지 못하고 날뛰던 맹획도 결국 제갈량의 높은 인품에는
감읍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소인배 맹획을 교화하는 과정은 여러 각도로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
은 인간에 대한 신뢰였다. 바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
교는 믿음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믿음에
대해 신뢰로 답하는 것은 아니다. 배은망덕한 일은 동
서고금을 막론하고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일뿐이다.
지금 새한·금강화섬 사태는 화섬업계에 다양한 의미를
보낸다. 그러나 새한·금강화섬 사태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는 식으로 해석할 사안이 아니다.
고합·동국무역 사태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서 이제 또
애물단지가 하나 더 늘은 셈이다.
기업개선이라는 미명의 워크아웃은 멀쩡한 기업마져 외
통수로 몰고 있다. 물론 자체적으로 위기극복을 못한
탓도 있다. 그러나 금강도 새한도 결국 워크아웃의 희
생자가 아니냐는 뜻이다. 그리고 또 워크아웃 업체가
추가된다면 이제 화섬산업의 앞날은 뻔하다는 자조적인
풍조가 만연하다.
화섬업체들이 새한·금강의 움직임에 예민한 반응을 보
이는 것은 다름 아니다. 이미 고합·동국무역 사태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상황에서 그나마 온전한 기업이라
도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화섬산업은 과잉공급 구조가 문제였다. 그리고 오늘 현
재 과잉공급은 도대체 풀 수 없는 숙제가 됐다. 이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무한경쟁의 결과
였다. 그러나 냉혹한 서바이벌 게임은 의미가 없었다.
약육강식의 승부는 끝났어도 한번 더 라는 기회가 부여
됐다. 바로 워크아웃이고 화의고 법정관리였다. 틀을 깬
경쟁은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자동차와 자전거의 경쟁으로 비유되기 때문이
다. 지금 워크아웃 기업은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있다.
그렇다고 결코 앞서가는 것도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정상기업만 죽지 못해 발길질만 해댄다. 이 모
두가 산업전체를 공멸로 이끄는 요소다.
이 같은 의미서 솔직히 워크아웃은 능사가 아니다. 워
크아웃 기업 때문에 정상기업이 비명횡사하는 상황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금융권을 비롯한 채권단은 워
크아웃을 수용하고 법원은 화의신청에 대해 재산보전처
분을 결정했다.
금융권이나 채권단의 결정을 놓고 이제 시시비비 자체
는 의미가 없다. 전례가 있었고 또 이 같은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각 개별기업들의 상황 때문이다. 이는 안
방마님과 부엌며느리의 입장처럼 두부 자르듯 명확하게
선을 그을 일만도 아니다.
그러나 새한·금강의 사태는 화섬산업에 있어서 제3의
위기를 부르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결론은
역시 대통합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제갈량의 칠종칠금
고사의 뜻은 다름 아니다.
결국 맹획을 이길 수 있다는 제갈량의 자신감에서